2016년 6월 20일 월요일

<나쁜 피> 단발머리를 빗질하다 머리를 터는 줄리엣 비노쉬, 아득하다

<나쁜 피>에 나오는 줄리엣 비노쉬를 닮은 여자에게 반해 있던 적이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나쁜 피>를 다시 보게 되었다.





졸면서 처음 봤을 때와는 전혀 달랐다.
장면 장면마다 미술에 크게 공을 들여 만든 것 같다.
연출력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쉬운 점이라고 하면, STBO라는 질병을 주 플롯으로 삼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분명 줄거리만 들었을 때는 사랑이 주가 되는 느낌이 아니라 한 편의 범죄 스릴러라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보는 내내 알렉스, 리즈 그리고 안나가 STBO에 걸렸는지 안 걸렸는지 생각하고 있었지만 영화 안에서는 이 소재를 맺지 않고 다른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느낌이 매우 독특한 영화. 다음에 다시 찾을 것 같다.

<셰임> 감정 표현이 서툴다는 것도 잘 표현해야 안다




유령처럼 살아가던 한 남자가 감정을 배우게 되는 이야기이다.
극장에서 보면 어떨까 하는 느낌에 KU 시네마트랩에서 재감상.
에스컬레이터 오프닝에서도, 공사중인 거리를 뜀박질하는 것도, 쓰리썸 씬도 큰 충격은 없었다. 오랜만에 영화에 집중할 수 있어 좋았지만, 왜인지 처음 보았을 때의 감흥은 느껴지지 않았다. 장면 장면이 강한 인상으로 박혔지만 마음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이번에 발견한 아쉬운 점이라고 한다면, 브랜든의 감정표현을 묘사하는 솜씨가 서툴었다는 점이다.
브랜든은 자기 여동생이 '유부남'과의 관계를 맺은 것에 화난 것이 아니다. 직장 동료와 관계를 맺는 사람이 '사랑하는 내 여동생'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못 하고 결혼제도 이야기를 들먹인다. 맥락상 '결혼제도' 이야기가 쌩뚱맞게 들려야 하지만 브랜든이 결혼제도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을 말하기 위한 영화는 아니었지만 그쪽으로 이야기의 중심이 많이 기울었던 것 같아 아쉽다.
첫 감상 이후 브랜든과 여동생이 과거에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을 것이라는 글을 읽었다. 그 사실을 전제로 하고 영화를 보다 보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이를 좀 더 암시해줬다면 브랜든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아가씨> 반전강박과 페미니즘



1
두 번의 반전 포인트를 두고 관객들을 의도하는 대로 끌고 가는 식의 영화다. 하지만 그 솜씨가 매끄럽진 못 하다. 숙희의 관점으로 전개되는 1부의 컨셉이라면 당연히 등장해야 했을 히데코가 숙희에게 진실을 밝히는 장면을 의도적으로 누락하고 복선이라는 명목으로 나뭇가지에 매달린 밧줄을 비춰준 것이 실망스럽다.
1부의 밧줄 씬이 크게 잘려나갔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나서 1부의 그 뒷장면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 전까지 1부를 이끌어나가던 주인공인 숙희의 생각을 완전히 오해하도록 편집한 것이다. 이것은 얄팍한 술수이고 결코 잘 만든 반전이 아니다. 제1부에서 관객은 오로지 숙희의 관점으로 이야기에 참여한 것 같지만 사실 우리가 속았던 1부의 후반부는 그 누구의 관점으로도 서술된 것이 아니다. 앞에 엄연히 존재했던 사실을 잃어버린 1부의 후반은 반전을 의도하고 기획했던 작가의 과한 욕심이 장악하고 있었다. 다 보여주고도 말이 되는 반전이었어야 한다. 더 잘 썼어야 한다.

2
두 명의 여자가 자기들을 착취한 변태 남성들로부터 벗어나 이상향을 찾아가는 이야기이지만 그 시선부터가 몹시 변태적이다. 변태 남성인 내가 보기엔 서비스컷이 그저 흐뭇할 뿐. 야하지 않았어야 한다는 게 아니다. 이 성적인 코드는 대체 누굴 위한 것이었나 하는 고민이 든다. 영화 속에 나오는 것과 같은 변태 남성들이 보고 즐긴다면 그것은 완벽한 실패가 아닌가? 단순히 억압받던 여성이 남성세계에 돌을 던진다는 것만으로 페미니즘은 성립하기 어렵다. 무엇을 위한 영화인지 헷갈린다. 페미니즘이라는 틀을 걷어내고 보아야 하는 걸까? 변태 감독 박찬욱의 생각은 어떤지 궁금하다.

2016년 6월 5일 일요일

<마이 플레이스> 삶이라는 거대한 그림




난 가족에 대해선 아는 것보다 알지 못 하는 것이 더 많다.
별로 알려고도 하지 않고, 무슨 질문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가족의 역사?
흠 글쎄.. 내가 태어나기 이전에 우리 부모님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 우리 부모님의 부모님은 또 어떤 사람이었을까.
<마이 플레이스>라는 영화에서는 미처 알지 못 했던 가족의 일대기를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면 좀 알 수 있을까.
지금의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대체 어디서부터 온 건지.



동생이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한국이라는 낯선 땅으로 가야 했던 것처럼
소울도 의도치 않게 어떤 차이를 안고 살아가게 되었다.


캐나다에서 온 여동생이 겪었던 어린 날의 슬픔이 어머니의 선택으로 인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돼도 무작정 어머니를 탓할 수가 없었다.
소울이가 언젠가 아버지의 부재 때문에 힘들어 하더라도 그가 그의 어머니를 탓할 수 있을까.
다들 나름의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며 살아가지만 정말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다.

완벽한 조건 속에서 아이를 키워야 아이에게 떳떳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과연 그렇게 모든 조건이 갖춰지는 때가 오기나 할까.
언제쯤 이 세상에 내 아이를 데려올 수 있을까.
자식이 부모를 탓한다는 게 좀 아이러니하기도 한데
내가 우리 어머니 아버지를 탓하다 보니 내 아이가 나를 탓하는 그림이 너무나도 쉽게 연상된다.

잠시 3대에 걸친 가족 이야기를 들여다 보았다.
내가 전혀 보지 못 했던 어른들의 큰 이야기.
어떻게 살아야 되는 걸까. 고민하고 또 고민해봐야 할 문제다.

<낮술> 우연히 만난 낯선 이들





코미디인줄 알았는데 그리 웃기는 영화는 아니었고.
낯선 사람들과의 몇몇 순간은 퍽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차기작인 <조난자들>도 비슷한 소재를 다룬 영화가 아니었나.
아쉬움도 가능성도 보였던 <낮술>이다.
언젠가 <조난자들>도 보게 될 것 같다.

아쉬움이라 하면
시나리오를 더 잘 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다.
기대감이라고 하면
시나리오를 더 잘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다.


펜션에서 만난 커플과 버스에서 만난 여자는 등장하는 분량에 비해 그리 많은 역할을 하지 않는다.
영화를 보고 난 뒤에도 여전히 이 사람들이 무슨 인물인지 파악을 못 하겠다.
아리송한 느낌을 주는 것이 의도적인 것이었다고 한다면, 시나리오를 잘 못 쓴 것이라고 생각한다.

펜션에서 만난 커플은 실제로 우연히 만날 수 있을 법한 사람들이다.
중반부 이후에는 등장하지 않는 점도 사실적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성이 영화의 흐름을 뚝 떼어버린 건 아니었는지.
좀 더 초반부에서 퇴장을 시켰더라면 재밌지 않았을까.)
이 영화를 사실적이라고 해야 할까.
중요한 순간순간에 등장하는 '버스에서 만난 여자'는 앞서 말한 커플과 달리 너무 비사실적인 느낌을 준다.
커플들에게 소지품을 빼앗긴 주인공이 도로에서 만나게 되는 순간은 코웃음을 대가로 너무 큰 우연에 기댔다.
펜션에서의 재등장도, 별로 하는 역할도 없이 극을 과한 우연으로 망쳐놓았다.


어떠한 멋들어지는 교훈도 찾을 수 없는 삶의 일면을 포착했다.
그 쪽에서 잘 한 것도 아니면서 "인생 그렇게 사는 거 아니"라던 트럭 운전사의 말.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나름의 합리적인 판단들이 인생을 구덩이에 빠트리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