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16일 일요일

<영 앤 뷰티풀> 야한 영화


1. 
영화의 오프닝.
놀랍게도 이들의 관계가 친남매라는 사실은 뒤늦게 밝혀진다.
이 영화가 남매 간의 위험한 관계를 다루는 영화는 아니지만
영화 전체에 이렇게 성적인 분위기가 감돈다.
이런 식의 관계 설정이 나는 너무 흥미롭다.
  


2. 
남동생이 누나의 자위를 훔쳐보는 장면
집에 들어온 이사벨이 나체의 아버지와 마주치는 장면
아버지가 샤워중인 이사벨의 화장실 문을 실수로 여는 장면
아버지가 자위하는 아들의 방문을 실수로 여는 장면
아버지가 남자친구와 섹스하는 이사벨의 소리를 듣는 장면

서로의 나체나 성행위를 보거나 듣게 되는 장면이 유독 많다.
성적인 긴장감.



3. 
이사벨은 엄마가 이것저것 묻는 것이 귀찮아서 남자와의 교제를 비밀로 한다.
누군가는 사소한 이유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공감이 가서 정말 좋았다.



4.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첫 관계 장면.
나는 이 장면을 '내 안의 소녀가 떠나갔다'고 표현하고 싶다.
기대와는 달랐던 첫경험.
묘사가 너무 슬프다.




5.
종종 속을 알 수 없는 그녀.
그녀는 자신의 고객인 어느 노인에게 마음을 품은 듯 싶으나
애무를 받으며 성감을 느끼는 장면 바로 다음에 자기 몸을 씻어내는 장면이 이어진다.
속을 알 수 없는 그녀..




6.
이 영화에서 모든 남자 캐릭터는 잠재적인 이사벨의 성적 대상이다. 자신의 양아버지까지도.
반면 모든 여자들은 이사벨의 젊음과 아름다움에 질투 어린 시선을 보낸다.




7.
어리숙한 남자애와 키스하고 나서 슬픔에 잠긴 표정으로 춤을 추는 그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영화는 다음 계절이고 마지막 계절이기도 한 봄으로 넘어간다.
봄이 없었다면 나는 이 영화에 전적으로 만족했을지도 모른다.
이 영화의 엔딩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그렇게 끝냈던 이유는 무엇일까?


-
여자애가 이쁘고 연기도 잘한다.
나는 야한 영화를 좋아한다.
<영 앤 뷰티풀>로 처음인 프랑수아 오종.
매력에 이끌려 다른 영화도 찾아보게 되었다.

<신나는 일요일> 1983 트뤼포, 스크루볼 코미디 + 스릴러


두번째로 본 트뤼포의 영화. 영자원에서 감상.
이번 영화는 초반부에 졸다가 일어나서 말똥말똥 보았다.
나름 볼만한 영화였는데 안 졸았더라면 더 재밌지 않았을까.
10년 뒤에 나온 우디 앨런의 <맨하탄 살인사건>을 연상시키는 스타일이었다.
스크루볼 코미디 + 스릴러 장르영화다.
이 영화만의 특징이라고 할 것은 딱히 없다.
트뤼포의 영화를 두 편씩이나 보았지만 아직 그만의 터치를 잘 모르겠다.
오버하지 않는 자연스럽고 소소한 코미디. 그것이 <여자들을 사랑한 남자>와 <신나는 일요일>의 공통점이다.

2016년 10월 15일 토요일

<이블 데드> 유쾌한 싸구려 유령의 집

사랑하는 애인이 괴물로 변해 아무 짓도 안 하고 깔깔거리며 웃는 장면..
이 영화에서 가장 무서웠다.



무지막지하게 괴상한 영화다.
분장이 이상한데 그걸 감추려 하지 않고 최대치로 끌어올려 이 영화만의 매력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래서 마치 좀 오래 된 유령의 집에 들어온 것처럼 들뜨고 코믹한 분위기가 영화 전반에 감돈다.
공포영화도 어차피 다 즐기려고 보는 거다.
<이블 데드>는 딱 적당한 정도의 공포였다.
유쾌해!
하여튼 이상한 영화.
긴장감도 있고 상상을 뛰어넘는 결말도 괜찮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좀비로 오인되어 사살당하는 흑인



<부산행>을 보고 이런저런 좀비영화를 거쳐 드디어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에 도착했다.
재밌다. 느린 좀비들에게서만 나오는 분위기가 있고 서스펜스가 있다. 달리는 좀비들을 피해 도망치는 것만이 긴장감을 주는 방법은 아니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을 가장 특별하게 해 준 것은 바로 결말이다.
좀비들의 침입으로 흑인 청년 벤을 제외한 사람들은 모두 좀비에 의해 죽어버린다.
아침이 밝고 좀비들을 사살해 불에 태우는 민병대는 벤을 좀비로 오인하고 먼 거리에서 살해한다.
시체가 된 벤이 쇠꼬챙이에 끌려나오는 사진과 불길이 피어오르는 영상으로 이 영화는 끝이 난다.
나는 이 영화가 인종차별에 대한 하나의 경고가 될 수도 있다고 보았다.
벤이 사람인지 좀비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총알을 발사한 민병대는 경찰이 무고한 흑인 청년을 범죄자로 오인해 총기로 살해했던 최근의 사건을 연상시킨다.
게다가 아무도 벤이 감염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 한 채 영화가 끝이 난다. 암담하다.

내용상으로 앞뒤가 안 맞는 부분이 아쉽긴 했지만 고전 좀비영화의 공포를 한껏 느낄 수 있었다. 다음 시리즈도 빨리 보고 싶다.

<엘레지> 멜로 그리고 감정이입




정통 멜로가 제일 어렵다는 게 이때문일까?
<사랑해, 파리>에서 인상적인 단편을 선보였던 이자벨 코이젯트 감독의 장편영화다.
약 5분여의 시간 내에 완결성 있는 하나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선보인 것을 보고 나는 나중에 그녀의 장편영화를 챙겨보기로 했다.
<엘레지>의 줄거리는 <사랑해, 파리>에 수록된 그녀의 단편과 닮았지만 일어나는 사건은 그 단편 속의 그것보다 흥미롭지 못하다.
112분의 러닝타임을 성실히 활용하지 않았다.
'이 아저씨의 매력은 대체 뭘까에 대해 고민하다 끝'이라는 코멘트만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다.
감정 이입도 잘 안 됐다.

줄거리.
여자관계 복잡한 늙은 교수가 어린 제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우연한 일로 인해 헤어진다.
시간이 흐르고 암에 걸린 제자는 교수를 찾아온다.
암에 걸린 제자가 교수를 찾아올 때는 우리나라의 연속극을 보는 줄 알았다.
평범하고 재미가 없다.


- 외부 장르의 혼용이나 기교 없이도 멜로는 정통 멜로만으로도 명작이 될 수 있을까?
<어바웃 타임>이나 <500일의 썸머>, <이터널 선샤인>... 생각나는 영화들은 죄다 빗겨나간다. <건축학개론>은? 흠...

특수하지 않은 보편적인 인물상만으로 좋은 멜로를 만들 수 있을까?
<엘레지>의 경우에는 남자주인공의 여자관계가 특수했다.

<나를 책임져, 알피>의 경우에도 남자주인공은 여자관계가 복잡하다.
<엘레지>보다 묘사되는 정도가 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정이입이 잘 됐던 건 무엇 때문이었나?
배우? 인물이 관객에게 말을 거는 기교? 주인공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

무슨 영화든 감정이입이 중요하다.
허문영의 표현을 빌리자면
주인공이 사랑하거나 그에게 의미 있는 군구가가 고통을 겪거나 죽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통이나 죽음 자체가 아니라, 그 누군가를 관객인 내가 동일시하는 주인공에게 사랑받을 만하고 의미 있다고 믿을 수 있게 만드는 장치와 테크닉이다. 실은 3인칭에 불과한, 그것도 허구의 존재일 뿐인 '누군가'를 반드시 '당신'의 자리로 끌어와야 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영화] 111p

기대하고 보았던 이자벨 코이젯트 감독의 <엘레지>.
다른 작품들도 이러한 나이브한 신파가 아닐까 걱정이 된다.
언젠가는 그녀의 다른 작품들을 또 꺼내보겠지.

2016년 10월 8일 토요일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 치매라는 형식, 망상이라는 내용

(우연히도 직전에 읽은 책과 똑같이 책이 붉은 색이다.)


나는 살아오면서 남에게 험한 욕을 한 일이 없다.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피우고 욕도 안 하니 자꾸 예수 믿느냐고 묻는다. 인간을 틀 몇 개로 재단하면서 평생을 사는 바보들이 있다. 편리하기는 하겠지만 좀 위험하다. 자신들의 그 앙상한 틀에 들어가지 않는 나 같은 인간은 가늠조차 못 할 테니까. 51p

마당에 서 있던 여학생 하나가 토를 달았다.
"시골 사람 조심해야 돼. 보기보다 집요하거든."
젊은이들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좋다. 82p

그래, 그걸 도둑망상이라고들 하지. 나도 그건 알아. 그런데 이건 망상이 아니야. 분명히 뭔가가 없어졌다고. 일지와 녹음기는 몸에 지니고 있으니 무사했지만 다른 무언가가 사라졌다.
"그래, 개가 없어졌다. 개가 없어졌어."
"아빠, 우리 집에 개가 어디 있어요?"
이상하다. 분명히 개가 있었던 것 같은데. 85p

-

'너무' 잘 읽히는 [살인자의 기억법]은 피와 폭력을 위해 바쳐진 소설처럼 보이지만, 그런 부분들은 오로지 마지막 부분의 대혼란을 위해 쌓아올린 반전장치일 뿐이다. 이 소설이 섬뜩해지는 순간은 김병수가 결국 싸움에서 패배하고 딸 은희가 잔혹하게 살해됐음을 밝히는 장면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지키고자 했떤 딸이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으리라는 불안이 밀려드는 장면이다. 154p
그러니까 이 소설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너무' 잘 읽히는 장면들은 오로지 이 급정거와 정적의 공포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만 굉음을 내며 질주하도록 정교하게 배치되어 있는 셈이다. 154~155p

불확실한 기억을 보완하기 위해 연쇄살인범은 모든 일들을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그리고 그것이 그의 세계를 지탱해주리라고 기대했는데, 그 기록 속에서조차 세계는 자기 자신과 불일치하며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다. 157p




최근에 읽었던 국내소설이 은희경 작가의 [태연한 인생].
재미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더 읽기가 벅차 그만두었다.
김영하의 문체가 그리웠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술술 읽혔다.
하루만에 한 권의 책을 다 읽어본 게 너무 오랜만이다.

은퇴한 연쇄살인범의 태연하고도 지독한 유머.
재밌게 읽다가 85페이지에서 순간 섬뜩해진다.
처음 보는 개를 은희는 우리 집 개라고 말했었다.
이번에는 우리가 개를 키운 적은 있었냐고 묻는다.
다음에는 다른 사람들이 와서 개에 대해 이야기한다.
개는 마당에 묻힌 시체를 물고 와 병수가 경찰서에 신고를 하게까지 만든다.
결국엔 우리가 보았던 이야기의 대부분이 김병수 노인의 망상이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된다.
김영하의 관심은 연쇄살인범이 또 다른 연쇄살인범을 만나 벌어지는 스릴러가 아니라 다른 데 있었다.

"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가 없거든."

서서히 내가 치매 환자가 된 것과 같이,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공에 가까워가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김병수의 순간순간의 생각들에 의존해 우리는 이야기를 전해듣는다.
그간 진실이라고 생각해왔던 것들은 모조리 부정당하고, 이제는 진실을 알 길이 없다.
김병수의 정신은 죽어서 더 이상 소설 속 세계의 전달자가 없다.
이제는 더 읽을 텍스트가 없다는 상황은 신선했다.


하지만 이 거대한 뻥은 좀 무책임하다.
이 소설의 반전이 단순하진 않아서 좋지만 이 당혹감을 나는 사랑하기가 어렵다.
좀 더 치밀하게 구성했더라면 그것에 가려져 김병수와 우리의 헛발질이 덜 강조되었을까?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이 제작되고 있다고 한다.
치매 환자의 순간순간의 생각들을 영화라는 매체가 어떻게 이겨낼지
그리고 이 결말로 어떻게 관객들을 이겨낼지 기대가 된다.

비평집 [보이지 않는 영화]



40상 51중 111중 175하 220중 221하 233상 243하 244상중 256상 258중

'아덴만의 여명'에서 우리는 중태에 빠진 석해균 선장의 회복을 진정으로 소망한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그 소망이 실은 인간적 염려 때문이 아니라 그 영화에 대한 우리의 만족이 훼손되는 것, 즉 그것이 영화에 그치지 않고 한 한국인의 실제적 죽음을 초래함으로써 완결된 패턴으로서의 우리의 환상에 구멍이 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은 아닐까. 40p

분노가 폭력을 낳는 것이 아니라, 폭력과 폭력 이미지의 생산을 위해 분노를 조성하는 것이다. 51p

주인공이 사랑하거나 그에게 의미 있는 군구가가 고통을 겪거나 죽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통이나 죽음 자체가 아니라, 그 누군가를 관객인 내가 동일시하는 주인공에게 사랑받을 만하고 의미 있따고 믿을 수 있게 만드는 장치와 테크닉이다. 실은 3인칭에 불과한, 그것도 허구의 존재일 뿐인 '누군가'를 반드시 '당신'의 자리로 끌어와야 하는 것이다. 111p

거의 클로즈업만으로 이루어진 영화가 있다 해도 이것이 결국 2인칭 영화가 되지 않는 것은 매 장면들이 결국 서사라는 하나의 질서로 정리되기 때문이다. 17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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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비>
많은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사이비>는 훌륭한 서사의 영화라고 말할 수 있지만 훌륭한 애니메이션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나는 어쩔 수 없이 20세기적 포토그래픽 시네마 편에 서 있으며, 그래픽 시네마가 인간의 얼굴을 담을 수 없다면 그에 값할 만한 무언가 다른 것을 보여줘야 한다고 믿고 있다. <사이비>에서 나는 무언가를 보았다기보다는 차라리 무언가를 들었다. 그것은 훌륭한 이야기였지만 애니메이션이 더 잘할 수 있는 건 아니다. 233p

<변호인>
당시 학회로 불린 대부분의 대학생 독서모임은 분명히 '정치적' 조직이었고, 한동안 학생운동의 기본 조직이었다. 이건 비화가 아니며, 그 시대에 대학을 다닌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243~244p
<변호인>에 등장하는 야학에서 피천득의 수필을 읽는 장면은 믿기지 않을 정도다. 모든 야학이 그렇진 않았지만, 대학생 독서회가 참여한 노동자 야학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연계를 위한 첫 단계였고, 거기선 국정교과서로 공부하는 일은 드물었으며 대개 노동자용 의식화 교재가 따로 사용되었다. '순수한' 독서 같은 건 있을 수 없었다. 독서는 당당히 불온했다. 244p
이 모든 취사선택의 목적은 명백하다. 의심과 토론의 여지없이 자명한 선악 대비를 위해 논쟁적 사실들을 버리는 것이다. 244p

<노예 12년>
'실'과 '화' 사이에 존재하는 불연속성과는 다른 차원의 불연속성이 '근거한'의 과정에 놓여 있다. 256p
우리는 그 고통의 이미지 앞에서 공포와 혐오로 분노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것을 즐기고 있는가. 258p





동아리 선배의 추천으로 읽어보았다.
읽는 기간 동안 내가 하는 말들 중 상당수가 이 책에서 본 것들이었다.
영향을 많이 받았다.
어느 한 곳에 빠지지 않으려면 다른 사람들의 책도 더 읽어봐야겠지?
어디서 본 것이 아닌 내가 스스로 해낸 생각을 가질 수 있는 지혜를 얻고 싶다.
짧게 인용할 만한 구절이 찾기 어려울 정도로 글 전체가 좋았던 건 영화 얘기 말고 무한도전 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