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8일 토요일

비평집 [보이지 않는 영화]



40상 51중 111중 175하 220중 221하 233상 243하 244상중 256상 258중

'아덴만의 여명'에서 우리는 중태에 빠진 석해균 선장의 회복을 진정으로 소망한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그 소망이 실은 인간적 염려 때문이 아니라 그 영화에 대한 우리의 만족이 훼손되는 것, 즉 그것이 영화에 그치지 않고 한 한국인의 실제적 죽음을 초래함으로써 완결된 패턴으로서의 우리의 환상에 구멍이 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은 아닐까. 40p

분노가 폭력을 낳는 것이 아니라, 폭력과 폭력 이미지의 생산을 위해 분노를 조성하는 것이다. 51p

주인공이 사랑하거나 그에게 의미 있는 군구가가 고통을 겪거나 죽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통이나 죽음 자체가 아니라, 그 누군가를 관객인 내가 동일시하는 주인공에게 사랑받을 만하고 의미 있따고 믿을 수 있게 만드는 장치와 테크닉이다. 실은 3인칭에 불과한, 그것도 허구의 존재일 뿐인 '누군가'를 반드시 '당신'의 자리로 끌어와야 하는 것이다. 111p

거의 클로즈업만으로 이루어진 영화가 있다 해도 이것이 결국 2인칭 영화가 되지 않는 것은 매 장면들이 결국 서사라는 하나의 질서로 정리되기 때문이다. 17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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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비>
많은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사이비>는 훌륭한 서사의 영화라고 말할 수 있지만 훌륭한 애니메이션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나는 어쩔 수 없이 20세기적 포토그래픽 시네마 편에 서 있으며, 그래픽 시네마가 인간의 얼굴을 담을 수 없다면 그에 값할 만한 무언가 다른 것을 보여줘야 한다고 믿고 있다. <사이비>에서 나는 무언가를 보았다기보다는 차라리 무언가를 들었다. 그것은 훌륭한 이야기였지만 애니메이션이 더 잘할 수 있는 건 아니다. 233p

<변호인>
당시 학회로 불린 대부분의 대학생 독서모임은 분명히 '정치적' 조직이었고, 한동안 학생운동의 기본 조직이었다. 이건 비화가 아니며, 그 시대에 대학을 다닌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243~244p
<변호인>에 등장하는 야학에서 피천득의 수필을 읽는 장면은 믿기지 않을 정도다. 모든 야학이 그렇진 않았지만, 대학생 독서회가 참여한 노동자 야학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연계를 위한 첫 단계였고, 거기선 국정교과서로 공부하는 일은 드물었으며 대개 노동자용 의식화 교재가 따로 사용되었다. '순수한' 독서 같은 건 있을 수 없었다. 독서는 당당히 불온했다. 244p
이 모든 취사선택의 목적은 명백하다. 의심과 토론의 여지없이 자명한 선악 대비를 위해 논쟁적 사실들을 버리는 것이다. 244p

<노예 12년>
'실'과 '화' 사이에 존재하는 불연속성과는 다른 차원의 불연속성이 '근거한'의 과정에 놓여 있다. 256p
우리는 그 고통의 이미지 앞에서 공포와 혐오로 분노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것을 즐기고 있는가. 258p





동아리 선배의 추천으로 읽어보았다.
읽는 기간 동안 내가 하는 말들 중 상당수가 이 책에서 본 것들이었다.
영향을 많이 받았다.
어느 한 곳에 빠지지 않으려면 다른 사람들의 책도 더 읽어봐야겠지?
어디서 본 것이 아닌 내가 스스로 해낸 생각을 가질 수 있는 지혜를 얻고 싶다.
짧게 인용할 만한 구절이 찾기 어려울 정도로 글 전체가 좋았던 건 영화 얘기 말고 무한도전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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