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후>는 <부산행>, <감기>에 이어 보게 된 재난 영화이다.
그동안 파보고 싶었던 대니 보일 감독의 영화이기도 하다.
나는 내가 좀비 영화면 다 좋아하는 줄 알았지만 <28일 후>를 보고 나서 아니란 걸 알았다.
주인공들이 군인 캠프에 들어설 때를 기점으로 영화 전반부와 후반부는 결이 확실히 다르다.
전반부는 마음에 들고 후반부는 그렇지 못 하다.
전반부는 인물들이 좀비를 피해 희망을 찾아가는 이야기이고
후반부는 여자를 성노리개로 삼으려는 군인들과 맞서는 이야기이다.
혹자는 오히려 후반부가 더 좋다고 할지도 모른다.
극한상황 속에서 얼마나 인간이 악해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재난영화, 그 중에서도 좀비 영화에 대해 내가 기대하는 것들이 이 영화엔 부족했다.
후반부는 좀비를 가지고 잘 이끌어나가던 이야기를 평범한 재난영화로 바꿔버렸다.
구조물 위에 걸려있던 좀비의 시체에서 우연히 떨어진 핏방울이 눈에 들어가 좀비가 되어버린 아버지를 빨리 죽여야만 하는 그 상황이 좀비 영화에서만 보여줄 수 있는 장면이 아닐까.
내 소중한 사람이 좀비가 되어버린 그 슬프고도 긴박한 순간..!
극한상황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악행 같은 것은 다른 재난영화에서도 충분히 볼 수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만족하지 못 한 후반부가 진짜 이 영화가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바이러스에 걸린 좀비보다 내 옆의 인간이 무서워지는 게 진짜 재난이 아닐까.
(물론 이에 집중하려면 차라리 다른 영화를 만드는 게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들긴 하지만..)
좀비를 풀어서, 또 직접 군인들을 처치하는 짐을 보고 셀레나는 그가 좀비일 거라고 잠시 착각해 칼을 든다.
약에 취한 해나 또한 셀레나에게 키스하는 짐을 좀비로 착각해 머리를 내려친다.
자기가 인간이라고 말하는 짐에게 해나는 말한다.
"좀비인 줄 알았어요."
악을 상대하기 위해 그것만큼 악해져야 하는 것이 너무 슬프고
그렇게 만들어진 악과 원래 존재하던 악을 구분하지 못 하는 상황이 너무 슬프다.
분노 바이러스에 감염된 좀비들과 분노에 미쳐버린 인간을 혼동하는 그 장면이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이 아니었을까
덧붙여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이 영화에서 마음에 들어했던
슈퍼마켓에서 주인공들이 마음껏 장을 보는 장면은
어느 재난영화에서나 연출 가능한 장면이다. ㅎㅎ
첨부된 음악과 함께 인물들이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카트에 쓸어담으며 다니는 게
정말 즐거워 보였다.
숨통을 트여주는 힘 조절이 좋았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