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15일 토요일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좀비로 오인되어 사살당하는 흑인
<부산행>을 보고 이런저런 좀비영화를 거쳐 드디어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에 도착했다.
재밌다. 느린 좀비들에게서만 나오는 분위기가 있고 서스펜스가 있다. 달리는 좀비들을 피해 도망치는 것만이 긴장감을 주는 방법은 아니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을 가장 특별하게 해 준 것은 바로 결말이다.
좀비들의 침입으로 흑인 청년 벤을 제외한 사람들은 모두 좀비에 의해 죽어버린다.
아침이 밝고 좀비들을 사살해 불에 태우는 민병대는 벤을 좀비로 오인하고 먼 거리에서 살해한다.
시체가 된 벤이 쇠꼬챙이에 끌려나오는 사진과 불길이 피어오르는 영상으로 이 영화는 끝이 난다.
나는 이 영화가 인종차별에 대한 하나의 경고가 될 수도 있다고 보았다.
벤이 사람인지 좀비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총알을 발사한 민병대는 경찰이 무고한 흑인 청년을 범죄자로 오인해 총기로 살해했던 최근의 사건을 연상시킨다.
게다가 아무도 벤이 감염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 한 채 영화가 끝이 난다. 암담하다.
내용상으로 앞뒤가 안 맞는 부분이 아쉽긴 했지만 고전 좀비영화의 공포를 한껏 느낄 수 있었다. 다음 시리즈도 빨리 보고 싶다.
라벨: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조지 로메로,
좀비
<엘레지> 멜로 그리고 감정이입
정통 멜로가 제일 어렵다는 게 이때문일까?
<사랑해, 파리>에서 인상적인 단편을 선보였던 이자벨 코이젯트 감독의 장편영화다.
약 5분여의 시간 내에 완결성 있는 하나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선보인 것을 보고 나는 나중에 그녀의 장편영화를 챙겨보기로 했다.
<엘레지>의 줄거리는 <사랑해, 파리>에 수록된 그녀의 단편과 닮았지만 일어나는 사건은 그 단편 속의 그것보다 흥미롭지 못하다.
112분의 러닝타임을 성실히 활용하지 않았다.
'이 아저씨의 매력은 대체 뭘까에 대해 고민하다 끝'이라는 코멘트만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다.
감정 이입도 잘 안 됐다.
줄거리.
여자관계 복잡한 늙은 교수가 어린 제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우연한 일로 인해 헤어진다.
시간이 흐르고 암에 걸린 제자는 교수를 찾아온다.
암에 걸린 제자가 교수를 찾아올 때는 우리나라의 연속극을 보는 줄 알았다.
평범하고 재미가 없다.
- 외부 장르의 혼용이나 기교 없이도 멜로는 정통 멜로만으로도 명작이 될 수 있을까?
<어바웃 타임>이나 <500일의 썸머>, <이터널 선샤인>... 생각나는 영화들은 죄다 빗겨나간다. <건축학개론>은? 흠...
특수하지 않은 보편적인 인물상만으로 좋은 멜로를 만들 수 있을까?
<엘레지>의 경우에는 남자주인공의 여자관계가 특수했다.
<나를 책임져, 알피>의 경우에도 남자주인공은 여자관계가 복잡하다.
<엘레지>보다 묘사되는 정도가 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정이입이 잘 됐던 건 무엇 때문이었나?
배우? 인물이 관객에게 말을 거는 기교? 주인공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
무슨 영화든 감정이입이 중요하다.
허문영의 표현을 빌리자면
주인공이 사랑하거나 그에게 의미 있는 군구가가 고통을 겪거나 죽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통이나 죽음 자체가 아니라, 그 누군가를 관객인 내가 동일시하는 주인공에게 사랑받을 만하고 의미 있다고 믿을 수 있게 만드는 장치와 테크닉이다. 실은 3인칭에 불과한, 그것도 허구의 존재일 뿐인 '누군가'를 반드시 '당신'의 자리로 끌어와야 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영화] 111p
기대하고 보았던 이자벨 코이젯트 감독의 <엘레지>.
다른 작품들도 이러한 나이브한 신파가 아닐까 걱정이 된다.
언젠가는 그녀의 다른 작품들을 또 꺼내보겠지.
2016년 10월 8일 토요일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 치매라는 형식, 망상이라는 내용
(우연히도 직전에 읽은 책과 똑같이 책이 붉은 색이다.)
나는 살아오면서 남에게 험한 욕을 한 일이 없다.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피우고 욕도 안 하니 자꾸 예수 믿느냐고 묻는다. 인간을 틀 몇 개로 재단하면서 평생을 사는 바보들이 있다. 편리하기는 하겠지만 좀 위험하다. 자신들의 그 앙상한 틀에 들어가지 않는 나 같은 인간은 가늠조차 못 할 테니까. 51p
마당에 서 있던 여학생 하나가 토를 달았다.
"시골 사람 조심해야 돼. 보기보다 집요하거든."
젊은이들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좋다. 82p
그래, 그걸 도둑망상이라고들 하지. 나도 그건 알아. 그런데 이건 망상이 아니야. 분명히 뭔가가 없어졌다고. 일지와 녹음기는 몸에 지니고 있으니 무사했지만 다른 무언가가 사라졌다.
"그래, 개가 없어졌다. 개가 없어졌어."
"아빠, 우리 집에 개가 어디 있어요?"
이상하다. 분명히 개가 있었던 것 같은데. 85p
-
'너무' 잘 읽히는 [살인자의 기억법]은 피와 폭력을 위해 바쳐진 소설처럼 보이지만, 그런 부분들은 오로지 마지막 부분의 대혼란을 위해 쌓아올린 반전장치일 뿐이다. 이 소설이 섬뜩해지는 순간은 김병수가 결국 싸움에서 패배하고 딸 은희가 잔혹하게 살해됐음을 밝히는 장면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지키고자 했떤 딸이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으리라는 불안이 밀려드는 장면이다. 154p
그러니까 이 소설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너무' 잘 읽히는 장면들은 오로지 이 급정거와 정적의 공포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만 굉음을 내며 질주하도록 정교하게 배치되어 있는 셈이다. 154~155p
불확실한 기억을 보완하기 위해 연쇄살인범은 모든 일들을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그리고 그것이 그의 세계를 지탱해주리라고 기대했는데, 그 기록 속에서조차 세계는 자기 자신과 불일치하며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다. 157p
최근에 읽었던 국내소설이 은희경 작가의 [태연한 인생].
재미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더 읽기가 벅차 그만두었다.
김영하의 문체가 그리웠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술술 읽혔다.
하루만에 한 권의 책을 다 읽어본 게 너무 오랜만이다.
은퇴한 연쇄살인범의 태연하고도 지독한 유머.
재밌게 읽다가 85페이지에서 순간 섬뜩해진다.
처음 보는 개를 은희는 우리 집 개라고 말했었다.
이번에는 우리가 개를 키운 적은 있었냐고 묻는다.
다음에는 다른 사람들이 와서 개에 대해 이야기한다.
개는 마당에 묻힌 시체를 물고 와 병수가 경찰서에 신고를 하게까지 만든다.
결국엔 우리가 보았던 이야기의 대부분이 김병수 노인의 망상이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된다.
김영하의 관심은 연쇄살인범이 또 다른 연쇄살인범을 만나 벌어지는 스릴러가 아니라 다른 데 있었다.
"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가 없거든."
서서히 내가 치매 환자가 된 것과 같이,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공에 가까워가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김병수의 순간순간의 생각들에 의존해 우리는 이야기를 전해듣는다.
그간 진실이라고 생각해왔던 것들은 모조리 부정당하고, 이제는 진실을 알 길이 없다.
김병수의 정신은 죽어서 더 이상 소설 속 세계의 전달자가 없다.
이제는 더 읽을 텍스트가 없다는 상황은 신선했다.
하지만 이 거대한 뻥은 좀 무책임하다.
이 소설의 반전이 단순하진 않아서 좋지만 이 당혹감을 나는 사랑하기가 어렵다.
좀 더 치밀하게 구성했더라면 그것에 가려져 김병수와 우리의 헛발질이 덜 강조되었을까?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이 제작되고 있다고 한다.
치매 환자의 순간순간의 생각들을 영화라는 매체가 어떻게 이겨낼지
그리고 이 결말로 어떻게 관객들을 이겨낼지 기대가 된다.
비평집 [보이지 않는 영화]
40상 51중 111중 175하 220중 221하 233상 243하 244상중 256상 258중
'아덴만의 여명'에서 우리는 중태에 빠진 석해균 선장의 회복을 진정으로 소망한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그 소망이 실은 인간적 염려 때문이 아니라 그 영화에 대한 우리의 만족이 훼손되는 것, 즉 그것이 영화에 그치지 않고 한 한국인의 실제적 죽음을 초래함으로써 완결된 패턴으로서의 우리의 환상에 구멍이 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은 아닐까. 40p
분노가 폭력을 낳는 것이 아니라, 폭력과 폭력 이미지의 생산을 위해 분노를 조성하는 것이다. 51p
주인공이 사랑하거나 그에게 의미 있는 군구가가 고통을 겪거나 죽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통이나 죽음 자체가 아니라, 그 누군가를 관객인 내가 동일시하는 주인공에게 사랑받을 만하고 의미 있따고 믿을 수 있게 만드는 장치와 테크닉이다. 실은 3인칭에 불과한, 그것도 허구의 존재일 뿐인 '누군가'를 반드시 '당신'의 자리로 끌어와야 하는 것이다. 111p
거의 클로즈업만으로 이루어진 영화가 있다 해도 이것이 결국 2인칭 영화가 되지 않는 것은 매 장면들이 결국 서사라는 하나의 질서로 정리되기 때문이다. 175p
-
<사이비>
많은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사이비>는 훌륭한 서사의 영화라고 말할 수 있지만 훌륭한 애니메이션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나는 어쩔 수 없이 20세기적 포토그래픽 시네마 편에 서 있으며, 그래픽 시네마가 인간의 얼굴을 담을 수 없다면 그에 값할 만한 무언가 다른 것을 보여줘야 한다고 믿고 있다. <사이비>에서 나는 무언가를 보았다기보다는 차라리 무언가를 들었다. 그것은 훌륭한 이야기였지만 애니메이션이 더 잘할 수 있는 건 아니다. 233p
<변호인>
당시 학회로 불린 대부분의 대학생 독서모임은 분명히 '정치적' 조직이었고, 한동안 학생운동의 기본 조직이었다. 이건 비화가 아니며, 그 시대에 대학을 다닌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243~244p
<변호인>에 등장하는 야학에서 피천득의 수필을 읽는 장면은 믿기지 않을 정도다. 모든 야학이 그렇진 않았지만, 대학생 독서회가 참여한 노동자 야학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연계를 위한 첫 단계였고, 거기선 국정교과서로 공부하는 일은 드물었으며 대개 노동자용 의식화 교재가 따로 사용되었다. '순수한' 독서 같은 건 있을 수 없었다. 독서는 당당히 불온했다. 244p
이 모든 취사선택의 목적은 명백하다. 의심과 토론의 여지없이 자명한 선악 대비를 위해 논쟁적 사실들을 버리는 것이다. 244p
<노예 12년>
'실'과 '화' 사이에 존재하는 불연속성과는 다른 차원의 불연속성이 '근거한'의 과정에 놓여 있다. 256p
우리는 그 고통의 이미지 앞에서 공포와 혐오로 분노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것을 즐기고 있는가. 258p
동아리 선배의 추천으로 읽어보았다.
읽는 기간 동안 내가 하는 말들 중 상당수가 이 책에서 본 것들이었다.
영향을 많이 받았다.
어느 한 곳에 빠지지 않으려면 다른 사람들의 책도 더 읽어봐야겠지?
어디서 본 것이 아닌 내가 스스로 해낸 생각을 가질 수 있는 지혜를 얻고 싶다.
짧게 인용할 만한 구절이 찾기 어려울 정도로 글 전체가 좋았던 건 영화 얘기 말고 무한도전 얘기.
<블레이드 러너> 단순하고 허술한
내가 '블레이드 러너'라는 제목의, 사람들이 말하는 그 영화와는 다른 동명의 영화를 본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영화는 정말 별로였다. 내용은 너무 단순하고 허술하기까지 하다.
단순
블레이드 러너가 있고 레플리컨트가 몇 명 있다. 한 레플리컨트를 좋아하게 된다. 한 레플리컨트는 블레이드 러너와의 대결 끝에 죽고 만다. 내용은 매우 단순하다. 죽음을 앞둔 레플리컨트는 자신의 이식된 기억을 진짜라고 믿고 싶어한다. 자기는 인간을 용서하는 능력까지 가졌다며. 별 거 없다. 기대가 너무 컸던 것 같다. 단순하다 단순해..
허술
레플리컨트를 인간과 구분해 제거하는 경찰이 필요해질 정도로 레플리컨트들이 사실적이었던 건 단지 레플리컨트 회사 회장의 예술적 욕심때문이었나? 레플리컨트가 사람보다 더 사람같은 세상이라는 가정 자체에 문제가 있다. 이들이 사람처럼 생각을 하고, 사람의 기억을 가지고, 사람의 피부를 가지고 사람처럼 움직여야 할 이유는 딱히 없었다. 인간과 레플리컨트를 구분해내는 신문은 참신하긴 하나 다른 기술력이 월등함에도 이러한 결점을 내버려뒀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액션
잠이 왔다.
볼거리
어둡고.. 비내리고.. 우울한 디스토피아적 미래 도시. 각국의 문화가 뒤섞인 광경. 별 것 없었다.
이 영화에 대해선 더 이상 감흥이 생기지 않는다. 영화 끝나고 나서도 정말로 이게 <블레이드 러너>가 맞나 싶어 인터넷을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강제로 봐야 하는 일이 생기기 전까지는 안녕히.
<서유기 - 월광보합> 영화와 웃음에 대한 가벼운 메모
주성치 영화를 그다지 좋아하진 않지만 갑자기 어! 하고 생각이 나서 충동적으로 보게 되었다.
서유기의 내용은 잘 알려져 있기에 영화는 내용보다는 코메디에 집중한다.
주성치는 웃긴 와중에도 슬픈 감정을 너무 잘 표현하는 사람.
상편만 떼놓고 보면 내용이 완결성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말 그대로 코메디다.
진지하고 무거운 영화 비평적 관점에서 주성치의 영화와 그를 따르는 팬들을 읽어내기란 어렵다.
어떻게 해서든 주성치 영화를 비평할 때에는 기존의 것과는 다른 잣대를 들이대야 할 것이다.
- 영화 비평가들이 코미디 영화를 못 읽는 건 아닐테고.. 어쩌면 대부분의 코미디 영화들이 과소평가 받는 것은 그 웃음을 가지고 할 이야기가 더 없기 때문이 아닐까? 그 장면 웃겼지. 하하하.. 영화를 본 관객들의 깊은 생각과 대화를 이끌어내는 웃음이라면 '가벼운' 웃음보다 더 낫다고 말할 수 있나? 분명 다른 종류의 것이다. 하지만 웃음이 웃음 그 자체가 아닌 사회 비판이나 의견 피력 등의 다른 것을 목적으로 사용된다면 나는 벌써부터 거부감이 든다(이 말은 내가 찰리 채플린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로 읽어도 좋다). 수많은 영화들이 코메디로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하지만 그것만으로 걸작이 되지는 못 한다. 그런데 그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내가 좋아하는 코메디는 무언가를 추가로 이끌어내지 않고 그 자리에서 끝났었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던가? 엄숙한 평론가들에게 적합한 코메디는 뭘까? 영화에서 코메디를 찾으려는 사람들에게 앉을 의자란 없는가? 영화와 웃음의 관계에 대해서는 오래 생각해 볼 일이다.
라벨:
서유기 - 월광보합,
웃음,
주성치,
코미디
<오늘 영화> 윤성호, 구교환
1. 백역사
윤성호 감독의 영화다! 영화!
영화란 것을 그리 대단한 것으로 소비하지 않는 젊은이들이 나온다.
윤성호 자신도 이제는 영화를 거창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속에 섞이는 걸까?
그래도 언젠가는... 멋지게 장편영화로 컴백하길 기다리고 있다.
세 편의 영화 중 가장 연출력이 좋았던 작품이다.
클럽에서 만난 여자와 영화 보다 모텔 가는 이야기를 이렇게 잘 찍을 수가 있을까!
자전거를 타는 남자, 귀엽게 흘러나오는 음악, 어수룩한 분위기.
긴장해서 말도 제대로 못 꺼내는 배우들의 연기도 아주 마음에 들었다.
여배우 의상 아주 마음에 들었는데.. 갈아입었다.
2. 뇌물
<오늘 영화>를 보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된 작품.
내가 구상하고 있는 시나리오가 이 단편의 표절인지 아닌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뇌물>을 보고 나니 형식이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어 형식을 달리 구상중이다.
세 편의 단편 중에서 가장 별로였다.
결국에는 영화감독과 배우의 스캔들, 비평가 조롱 정도의 농담선에서 끝나는 영화였기 때문이다.
여배우가 예뻐서 다행이었지 늘어지는 술자리 씬, 선배 감독에 대한 열등감, 묘한 성적 분위기는 뻔하고 유치하기까지 했다.
마트료시카같은 형식과 내용도 아예 따로 논다.
형식에 맞는 내용, 아니면 내용에 맞는 형식이 필요했을 것이다.
3. 연애다큐
연출이 아쉬웠지만 세 단편 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실제 등장인물들이 들고 찍은 영상을 삽입하고 본명을 사용해 마치 실제같은 느낌을 주지만
인공적인 장면들이 나올 때마다 감정이 깨진다.
처음에는 실제 사람들의 연애 과정을 다룬 다큐멘터리인 줄 알았다.
100% 페이크 다큐멘터리로 찍었다면 어땠을까?
페이크 다큐멘터리도 아니고 실제 다큐멘터리도 아닌데 잠시 착각을 불러일으켰던 극영화다.
연애 다큐를 찍는다는 설정이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들어주지만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들이 부족해 오히려 초라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가깝게 지내던 두 연인이 이별하게 되었던 그 이유가 납득이 안 갔다. 정말 예술취향 때문에?
마지막 장면.
산산이 부서진 도자기 조각들을 본드로 붙여 온 교환.
여자친구 앞에서 자신이 생각해낸 그 도자기의 의미를 말한다.
"안 예쁘잖아.."
와장창!(이 부분에서 도자기가 좀 더 멋지게 깨졌더라면.. 하는 아쉬움)
이 대사의 의미를 깨닫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구교환이라는 배우이자 감독이 앞으로도 좋은 영화 많이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정말 매력적인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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