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9월 19일 화요일
<시네도키, 뉴욕> 동아리의 마지막이 될 뻔한 영화
이 영화를 끝으로 동아리 자체를 마무리하려 했었다.
사람이 12명 오고, 5명 오다가 이 영화를 내가 발제할 때 2명이 와버려서
너무 화가 났다.
다행히도 몇달 뒤 다른 분이 나타나서 동아리를 다시 이끌어주셨다.
그분이 없었다면 아마도 동아리는 고인 물로 남아 영영 썩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말하기를, 내 이전 회장 때부터 동아리의 암흑기였고 내가 맡을 때가 더 심한 암흑기였다고 한다.
나는 그냥 암흑기 때 뭣모르고 들어온 사람이고, 새내기라 뭘 잘 할 줄도 모르던 내게 동아리를 맡겨버린 것이 미안하다던 사람들도 있다.
내가 동아리를 그만두기로 결심했던 이유에 대해서 사람들은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
이건 아무래도 내게 이 얘기를 한다는 것 자체를 민감하게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내가 잘못한 게 누가 봐도 명백해서 굳이 이야기를 더 하지 않으려는 건가?
아니면 동아리를 내버려두고 자기 할 일 하던 것이 미안해서일까?
내가 나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못 들으니 제대로 된 이유는 앞으로도 알기 힘들 것 같다.
아무튼 <시네도키, 뉴욕>이라는 영화 주인공의 초라한 결말과 함께 동아리를 끝내려 했다.
내가 동아리에 10분을 늦었는데 아무도 없었다.
내가 잘못 왔나? 사람들한테 공지를 제대로 안 했나? 몇 분 있다가 내가 동아리에 소개한 친구 한 명이 왔다. 그게 전부였다. 좋아하는 후배와의 식사를 접고 온 것이라 기분이 너무 안 좋았다.
동아리는 다시 돌아왔는데, 굳이 안 좋은 얘기 해서 뭐하나.
동아리를 끝내려 했던 그 날을 사람들이 상기시켜주지도 않고 그래서 <시네도키, 뉴욕>은 얼마간 다시 돌아보고싶지 않은 영화였다.
그러다 최근에 동아리 선배의 지목으로 베스트 영화 10편 목록을 만들다가 이 영화가 떠올랐다.
가장 먼저 떠올랐던 영화들에 비해서는 내 취향이 아니지만, 지난 4월에 다시 볼 때 너무 좋게 봤던 기억이 있어 리스트에 넣어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에드 우드>나 <어바웃 타임>같은 영화로 대체할 수 있을 것 같다.
내 베스트 영화 10편을 본 동아리 사람들 몇몇은 <시네도키, 뉴욕>을 정말 좋아한다고 밝혔다.
그래서 이 영화에 대한 나의 팬심을 밝히고.. 그랬다.
4월에도 동아리에 온 사람이 두 명뿐이라 녹음해서 잡지에 실어보려고 했으나
나만 혼자 말을 너무 많이 해서 차라리 나중에 글로 쓰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가능하다면 지금이라도 <시네도키, 뉴욕>이나 <에드 우드>에 관한 글을 써서 잡지에 실어봐야겠다)
<시네도키, 뉴욕>은 마음에 드는 부분이 너무 많았다.
가장 특이하다 느낀 건 시간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 하는 데서 오는 슬픔이다.
기본적으로 영화는 한 씬에서 그 씬의 길이만큼의 시간을 다루는데
이 영화는 많이 달랐다.
한 씬 안에서도 뉴스나 신문, 대사, 유통기한 표시 등을 통해 이상하게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간다.
영화 전체적으로 이러한 이상한 현상들이 주인공도 눈치채지 못 하는 사이에 일어난다.
또 무슨 얘기를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빠른 시일 내에 영화를 한 번 더 보고 글을 써야겠다.
<휴먼 센티피드> 소재가 멱살잡고 끌고간 케이스. 수준 이하의 각본때문에 생각하기도 싫다
고어영화 보기 소모임의 마지막날은 <휴먼 센티피드> 트릴로지로 장식하려 했다.
하지만 1편 자체가 너무 구려서 다음편을 보지 않기로 했다.
사람들의 항문과 입을 연결해서 지네를 만들어버린다는 기괴한 설정으로 뜬 이 영화는
뽑아먹을 것이 그 기괴한 설정 하나밖에 없다.
웬만한 너그러운 장르매니아도 돌아설 캐릭터와 내용, 연출 때문에 기대했던 속편들은 보지 않기로 했다.
진짜로 내가 각본 써도 이것보단 나을 것 같다. 이건 농담이 아니다.
인간지네라는 독특한 소재 때문에 중간만 해도 컬트 명작으로 이름을 날릴 수 있었을텐데..
<마터스: 천국을 보는 눈>, <세르비안 필름>을 보면서 고어영화에 대한 생각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휴먼 센티피드>는 장르적 요소보다 구린 내용이 너무 커서 아무런 생각을 하지 못 하겠다.
세 편의 영화를 가지고 이어서 한 편의 글을 써 보려고 했는데 실패했다.
황급히 남은 두 편의 영화를 <살로 소돔의 120일>로 대체하려고 했지만 인터넷이 너무 느려서 다운받지를 못 했다.
대신 하드에 있던 <스크림>을 보았다. 그저 그랬다.
매우 짜증이 나는 건, 이상하게도 <휴먼 센티피드 2>가 너무 보고싶다는 거다...
나중에 세어보니 <휴먼 센티피드>가 올해 100번째로 본 장편영화였다.
맙소사..
2017년 9월 17일 일요일
<춘몽> 소녀 한 명과 아저씨 세 명
윤종빈 감독의 <용서받지 못한 자>를 내가 좋아한다.
그리고 장률의 <경주>도 좋아한다.
그래서 윤종빈 감독이 출연하는 장률의 <춘몽>을 보게 되었다.
예고편의 훈훈한 분위기와 달리 영화 자체는 좀 서늘하다.
농담스럽게 찍힌 코믹한 장면들이 많지만, 그 의미를 알 수 없이 섬뜩하게 연출된 장면들도 간혹 튀어나온다.
또 옅은 녹색빛의 무채색 영상은 분위기를 영화 내내 축 가라앉혀 놓는다.
영화는 만족스러웠다. 은근한 매력이 있다.
세 명의 남자가 여자 한 명을 둘러싸고 돌아다닌다는 점에서 <우리 선희>도 생각이 난다.
<우리 선희> 쪽에 비하면 여기 남자들이 더 멍청하고 순수하다.
예리와 자고 싶다, 가슴 만지게 해 달라는 식으로 남자들의 욕망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만
그렇게 투명해서인지 오히려 정범과 익준 두 사내에겐 의심이 안 생긴다.
오히려 아무 말 없는 쪽이. 정범이나 <우리 선희>의 남자들이 많은 걸 숨기고 것처럼 보인다.
바보같고 순수한, 실제로 저런 관계가 있기나 할까 싶을 정도로 신기한 관계.
계획된 세상. 모든 것이 통제된 술집. 모든 것이 통제된 단역.
이 영화만의 매력이 있었다.
나중에 <춘몽>을 다시 찾고플 때가 올 것이다.
<다크 나이트> 배트맨, 어둔 밤에게 길을 내 줘..
<다크 나이트>가 재개봉을 해서 동아리 사람들과 함께 보러 갔다.
다크 나이트를 인생 영화로 꼽는 사람들도 많고
다크 나이트가 개봉했을 때 극장에서 봤던 사람들의 경험담도 많이 들어서
재개봉을 했으니 한 번쯤은 보러 가야지~ 하는 마음으로 사람들과 함께 갔다.
영화 자체는 괜찮았다.
하지만 내가 좋아할 만한 영화는 아닌 것 같다.
영화를 본지 그렇게 오래 된 건 아니지만 그 때 내가 뭘 느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오히려 <다크 나이트>를 본 뒤 바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본 <어둔 밤>이라는 패러디 영화가 훨씬 내 맘에 든다.
심하게 말하자면, 내게 <다크 나이트>는 <어둔 밤>을 위한 재료 격이었다.
<어둔 밤> 속에 등장한, 팬이 아니고서는 기억하기 어려운 <다크 나이트>의 요소들을 나는 본지 얼마 안 됐기에 알아볼 수 있었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점심을 함께했다.
하지만 영화 얘기는 거의 안 했다.
왕십리까지 가서 <다크 나이트>를 본 것이 약간 허무해졌다.
스크린도 크고 사운드도 빵빵하고 그랬지만 내 안의 무언가를 건드리진 않았다.
앞으로도 굳이 좋은 설비의 극장을 찾아다닐 일은 없을 것 같다.
<잃어버린 지평선> 1937 서양인들이 보았던 동양의 신비~
영상자료원에 가면 평소에 구할 수 없는 영화를 찾아서 본다.
<멋진 인생> <어느 날 밤에 생긴 일>로 유명한 프랑크 카프라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훑다가 이 영화의 줄거리를 읽고 끌려서 보게 되었다.
영화는 내가 좋아했던 그의 두 편의 영화들에 비해 많이 지루하고 재미없었다.
1937년도 서양인들의 시각과 2017년도 동양인의 시각 사이의 온도 차이를 크게 느꼈다.
영화는 1937년도 서양인들이 가졌을 법한, 동양을 신비롭고 이상적인 세계로 그려내는 오리엔탈리즘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것을 잘못이라고 지적하려는 건 아니다. 시대가 그랬으니까.
그리고 지금 시대는 2017년이고 나는 저 영화가 겨냥했던 미국사람이 아닌 한국사람이니까. 재미가 없었다.
프랑크 카프라의 다른 영화들이 이러한 시대 차이, 국적 차이를 무시하고 내게 와닿았었는데.. 이 영화는 대실망이다.
<멋진 인생>과 <어느 날 밤에 생긴 일>은 시대와 국경을 뛰어넘어 문화적으로 일관된 코드를 잘 읽어낸 결과물이지만, <잃어버린 지평선>은 유치해서 봐줄 수가 없다.
영화 속의 신비로운 동양인들이 가지고 있는 그들만의 '무언가'가 대체 무엇인지도 알 길이 없고
그 신비로운 '무언가'로 인해 나타나는 결과가 250년을 사는 '장수'이다.
알멩이 없는, 완전히 외지인의 시선에서 바라본 동양의 모습이다.
프랑크 카프라의 영화에서만은 무언가 특별함이 있기를 바랐다.
그의 다른 영화를 또 알아봐야겠다.
<제7의 봉인> 의외의 얄팍함
동아리에서 이야기를 나눴던 영화.
<제7의 봉인>를 어려운 영화의 대명사라고 생각했던 나는
발제자가 일부러 허세를 부려서 이 영화를 골랐구나 하고 생각했다.
발제자는 종교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본 적은 없는 이 영화를 골랐다고 한다.
생각만큼 엄숙한 영화는 아니었다.
광대가 주요 인물로 나오며, 코웃음 나는 해프닝도 벌어진다.
이야기가 이해할 수 없게 흘러가는 그런 영화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니고 있는 명성에 비하면 꽤 초라한 영화였다.
죽음 그리고 인생에 관한 나름 진지한 성찰을 담았다고 하는,
불후의 걸작으로 남아있는 이 영화의 속은 의외로 간단했다.
내가 지금까지 보아온 평범한 영화들에 비해 더 뛰어나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대체 철학적인 고민이라는 것이 영화매체에 담길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건 앞으로 다른 영화들도 보면서 차차 생각해볼 문제이다)
영화는 결말부에 가서 대부분의 인물들을 죽음과 맞닥뜨리게 하면서도, 광대 부부만은 살려둔다.
여전히 가시지 않는 죽음의 그림자가 있긴 하지만, 주인공이 광대 부부로부터 받은 은혜에 기뻐했던 장면을 생각하면 영화는 이들 부부를 긍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광대 부부가 이 영화에서 나타내는 것은 해학, 베풂, 아기, 순진함 등이다.
이러한 것들을 전염병이 창궐하는 것과 같은 암울한 시기 속에서도 지켜내야 했던 인간적인 미덕이라고 영화는 보고 있는 것 같다.
따지고 보면 거의 상식적인 수준의 교훈을 이야기하고 있는 건데, 괜히 어려워보이고 엄숙해보여서 깎아내리기 어려운 것 같다.
이런 영화를 보면 딱히 할 얘기가 없다.
영화가 이미 할 말을 명확히 다 했고, 관객으로서 덧붙일 말도 없기 때문이다.
책 [사이버 섹스] 21세기의 섹스 파트너는 컴퓨터?
사이버 섹스......
정신의 고통이 없는 사랑이 있다면, 고통없이 기쁨만을 주는 사랑이 있다면, 사랑의 시작과 끝에 대한 불안감이 없이 사랑할 수 있다면 이에 대한 유혹을 쉽게 뿌리칠 수 있을까? 컴퓨터 테크놀러지와 사이버문화의 발전은 우리를 이런 사랑에 대한 가능성으로 안내할 것이다.
-머리말
20세기의 마릴린 먼로에 이어 21세기형 섹스 심벌로 이 박물관은 작은 컴퓨터를 제시한다. 21세기의 섹스 파트너는 컴퓨터가 된다는 것이다.
-17쪽
에로틱한 테크놀러지적 충동은 2만7천년 전에 구운 진흙으로 만들어진, 과장된 가슴과 엉덩이를 가진 비너스상과 같은 초기의 예술작품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이는 도기 제작기술이 항아리처럼 실용적인 물건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떤 것보다 1만5천년이나 전의 일이었다.
-23쪽
1984년에 개발돼 약 10년간 전세계적으로 약 200만 카피가 판매된 게임 Leisure Suit Larry 시리즈.
미국의 전자오락기가 한국에 상륙한 것은 1970년대 말이다. 일본과 거의 같은 시기였지만, 컴퓨터 게임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두 나라가 판이하게 달랐다. 한국은 전자오락이 청소년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며 관련기관에선 각종 규제를 해나갔고, 따라서 오락실을 출입하는 학생들은 교외지도 선생님들의 단속대상이 됐다.
반면 일본에서는 전자오락의 문화적, 상업적 가치를 인정하고 건전한 놀이문화로 유도하자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10여년이 지난 뒤 그 차이는 확연하게 나타났다. 사회의 부정적인 여론과 각종 규제 속에 음지로 숨어 들어간 한국의 게임산업은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 모두 전멸하다시피 했다. 반면 일본은 닌텐도, 세가, SNK 등 5백여개 게임업체가 세계시장의 80%를 점유하는 컴퓨터게임 왕국으로 성장했다.
-39쪽
겉으로 우리 사회는 선비 같은 모습을 지니고 있지만 밤의 문화는 정반대이다. 성의 정직한 표현은 금기시하면서 그늘에 숨어 성을 사고 파는 조선 사대부의 행태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성은 억압할수록 그 음지가 늘어날 뿐이다.
-98쪽
미 스탠포드대 교수이자 사이버섹스 치료사인 앨빈 쿠퍼 박사는 사람들이 인터넷 섹스에 탐닉하는 이유를 인터넷이 가진 3가지 특성인 3A, 즉 'Access, Affordability and Anonymity'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119쪽
기계론적 가치관에 빠져 원만한 인격체로의 성장에 장애를 불러올 수 있다. 정과 교제와 친밀함 등 이른바 '스킨쉽 문화'에 의해 가치관이 정립되지 않고 컴퓨터가 마련해 준 공간에 의해 가치관이 싹트기 때문이다.
-168쪽
수트를 입고 섹스를 끝낸 뒤 '섹스 후에 피는 담배 한가치'의 느낌을 연인과 나눌 수 있을까? 연인의 땀구멍에 배어나오는 사랑의 흔적을 실제처럼 보여줄 수 있을까? 섹스 후의 나른함과, 늦은 아침식사를 함께 할 수 있을까?
-176쪽
만약 사용자가 자신의 이상형-유명인이나, 아니면 현실에서는 거절당한 사람-과의 섹스를 창조할 수 있다면, 유명배우를 대량 복제해 수 천명의 사람들이 바디 수트를 통해 그 배우와 성관계를 한다면 어떻게 될까?
-182쪽
프리섹스가 만연하고 있는 가운데 사이버 섹스까지 가세한다면 부부를 중심으로 한 가정은 더욱 설 땅을 잃게 되고 사회공동체의 붕괴가 가속화될 것이다. 결국 사이버섹스는 전통적인 혼인제도와 가족제도, 나아가 인간관계마저 파괴하고 말 것이다.
-185쪽
생각해보면 사이버섹스는 식도락과 같이 좀 유별난 취미일 뿐이다. 그것을 즐기는 소수의 사람이 있을 뿐이다.
미래에도 연인들은 여전히 옷을 벗고 땀을 흘리며 섹스할 것이다. 하지만 미래의 연인들이 요즘과 조금은 다르게 행동할 것이라는 것은 인정한다.
-192쪽
내 성욕을 다른 방식으로 다뤄보는 차원에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책 표지에 있는 머리말 구절이 너무 감성적이라서 도서관에서 이 책을 바로 골랐다.
책 자체는 읽기 쉽게 쓰여 있는데 내가 너무 오랜 시간을 들였다.
그리고 따져보면 굳이 읽어야 되는 부분이 많지도 않다.
내가 얻어가고 싶은 건 어느정도 얻어갈 수 있었는데
책 자체가 인터넷 문화 전반을 다루려 하기 때문에
원했던 것 이상으로 많은 텍스트를 읽어버렸다.
인터넷이 한창 발달하고 있던 2003년에 쓰인, 사이버 섹스에 관한 책이다.
사이버 섹스라 함은, 뭐더라...
섹스파트너를 사람이 아닌 컴퓨터라고 표현한 것이 신기했다.
크로넨버그의 <비디오드롬>이 이해가 잘 갈 것같고 그런다.
성적으로 여러가지 상상을 해볼 수 있던 책이다.
2017년 버전으로 똑같은 주제로 책을 내놓아도 괜찮을 것 같다.
<잭 앤 질> 최악의 영화 타이틀을 떼어낸다면..
골든 라즈베리 어워드 해당 해 전체 부문을 싹쓸이 수상해서 전설로 남아있는 영화입니다.
예전부터 이 영화가 대체 무슨 잘못을 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있었지만 용기가 잘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이번에 1000원을 내고 <잭
앤 질>을 구매해 감상했습니다.
줄거리 소개.
추수감사절을 맞아 광고 기획자인 잭(아담 샌들러)의 가정에 못생기고 예의없는 쌍둥이 여동생 질(여장한 아담 샌들러)이 눌러앉습니다.
잭은 그래도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이라 외로움에 빠진 질을 위해 소개팅 사이트를 이용하지만 그녀는 더 우울해질
뿐입니다.
그러다 잭이 광고에 섭외하려고 혈안이 된 알파치노가 질에 반해버립니다.
하지만 그녀는 알파치노를 원치 않고, 잭은 어떻게든 이 둘을 이어보려
합니다.
저는 이 영화가 최악의 영화 명예의 전당 자리에 오른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이 영화도 분명 애매한 영화이긴 하지만, 다른 애매한 실패작들에 비해
결코 심하게 뒤쳐진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다른 못 만든 영화도 많은데 왜 하필 이 영화가 골든 라즈베리 어워드 10관왕
수상을 거머쥐었는지 납득이 안 갑니다.
알 파치노의 변신이 너무 파격적이었던 걸까요?
영화를 보는 기분은, 그냥 SNL 한
회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예전에 고등학교 때 노는 시간에 누가 틀어줬던 SNL보다는 훨씬 재미있었습니다.
<잭 앤 질>을
보면서 몇 장면에서 소리내어 웃었다는 사실에 지금 자괴감이 들긴 하네요..
영화는 꽤 일찍부터 마음에 들었습니다.
바로 질이라는, 대체 누가 그녀에게 사랑을 줄까 싶을 정도로 매력없는
캐릭터가 자기 감정을 드러내는 순간 때문이죠.
별 생각 없이 만들어진 영화이지만, 저는 질이라는 캐릭터에 어느정도
진지하게 빠져들었습니다.
고모는 아이가 없냐는 조카의 질문에 애써 당당한 척 대답하는 질에게 연민이 갔습니다.
그리고 인터넷 소개팅으로 만난 남자가 화장실에 간다고 하고 몰래 도망가 버렸지만 바보같이 끝까지 그를 믿으려
하는 장면도 좋았습니다.
저는 사랑 경쟁에서 선택받지 못하고 도태된 루저 캐릭터 질의 인생이, 생각이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결말은 이러한 루저 감성까지도 가족주의 안으로 급하게 끌어모으려 했기에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질이라는 저 괴상한 여자에게 어떻게든 억지를 써서 짝을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극장을 찾은 관객 대부분을 만족시킬
수 있는 happy한 엔딩이라고 각본가는 생각했나 봅니다.
사실 제 생각에도 돈 벌어야 하는 상업영화 만들려면 이렇게 결말을 맺는 것이 제일 간단해 보이기도 하구요..
결정적인 얘기를 해드릴게요.
이 영화가 의외로 실망스럽지 않았던 것은 맞지만, 굳이 시간내어 볼
필요는 없는 영화였습니다.
대부분의 킬링타임용 영화들이 그렇듯, 적당히 웃겨주고 적당히 집중시키다가
적당히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공감할 만한 가족주의를 건드리고 끝냅니다.
아마도 이건 나중에 돌아보면 내가 봤는지 안 봤는지도 모르는 그런 영화들 중의 한 편이 되겠죠.
궁금하지만 굳이 볼 필요는 없는 영화를 대신 리뷰한다는 점에서 [시네:망] 프로그램에 잘 맞는 영화 선택이었다고 봅니다.
한주의 한줄평.
별점 4/10
최악의 영화라 하기엔 나름 볼 만하다. 그래서 최악의 영화라는 타이틀을
떼어낸다면 정말 아무것도 아닐 영화이다.
라벨:
골든 라즈베리 어워드,
라디오,
아담 샌들러,
잭 앤 질
2017년 9월 16일 토요일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전체관람가용 '그리움을 이겨내는 방법'
스토리 요약.
아버지가 집을 나가고 피자 봉고차에서 살게 된지 한달째인 이레. 부동산에서
‘평당 500만원’이라는
전단지를 보고 500만원이면 집을 살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녀는
단짝친구와 함께 노부인의 개 월리를 훔쳐 500만원을 받아내는 방법을 생각해낸다. 하지만 월리를 노리는 자는 이들뿐만이 아니었다.
(스포일러) 월리가 노부인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깨달은 지소는 월리를 구해내 노부인에게 사실을 밝히면서 돈을 받지 않고 데려다 준다. 이를
기특하게 여긴 노부인은 지소네 가족에게 작고한 아들의 집을 전세 500만원으로 판매한다.
눈물을 강요하는 신파적 요소 없었다.
시나리오가 촘촘하다. 조연 캐릭터들이 사건에 잘 어우러진다. 사건의 진행 또한 매끄럽다.
이 영화가 괜찮은 영화일 줄은 몰랐다.
대기업의 독과점으로 개봉 당시 스크린 수를 얼마 얻지 못 했던 개훔방.
일부러 개훔방을 보러 가는 관객들, 일부러 상업영화인 개훔방 스크린을
열어주는 예술영화관이 난 의아했다.
나는 이 영화에 흥미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출연진이 빵빵하지만 관심있는 배우는 아무도 없고
전체관람가 영화를 내가 잘 못 본다..
그리고 ‘평당 500’이라는
소재가 유치해보였다.
그런데 울었다. 나를 울게 한 영화는 꼭 기억해두는 편이다.
1.
집을 나간 강아지도, 자기 아버지도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말. 상처를 덜 받기 위해 만들어낸 자기암시처럼 들렸다. 이렇게
이 슬픔을 이겨냈구나. 불쌍하고 짠했다. “집을 나가긴 한건데
길을 잃어버려서 못 찾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도 아빠는 언젠가 길을 찾아서 집에 돌아올 거예요. 월리도 그렇고요.”
2.
아무리 힘들어도 그건 잘못이라는 김혜자 선생님의 말씀.
“힘든 시간들을 겪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나쁜 짓도 하게 되는 법이지. 그렇다 해도 네가
한 짓은 정말 나쁜 거야. 지소야 그건 변하지 않아.” 좋게
타이르는 용서의 과정. 억지
사과가 아니라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감정. 정말 소중한 감정이다.
인물들 저마다의 상실을 보았다.
지소 : 아버지와 집의 부재
엄마 : 남편과 집의 부재
노부인 : 남편과 아들과 월리의 부재
대포 : 딸과 집의 부재
지소는 부정한 방법을 썼다가 이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다. <소원>이라는 영화에도 나왔었는데 연기 자연스럽게 한다. (아이답지
않다는 느낌도 받는데 아이다운 행동과 말투가 무엇인지 너무 오래되어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지석이
내가 생각하는 아이에 좀 더 가깝다.)
엄마는 두 남매를 책임지는 생활꾼. 지소가 그녀의 사정을 이해하지
못 했지만, 그녀 또한 남편을 잃은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극적인 화해.
노부인은 초반에는 공공연하게 자기의 슬픔을 알리지 않는 비밀스러운 인물로 등장한다. 후반부에 가서야 조카의 입을 통해 남편이 집을 나갔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그림을
통해 아들을 잃었다는 사실을 지소에게 털어놓는다. 화가의 길을 걷고자 해 사이가 좋지 못했던 아들이
집을 나가고 얼마 가지 않아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아들의 집에 있던 월리가 아들의 빈자리를 메워주는
존재. 그런 월리마저 떠나자 상심한 그녀는 월리가 남편처럼, 아들처럼
집을 나간 것이라고 찾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그녀를 찾아온 지소의 설득으로 월리를 찾아야겠다고 마음먹는다. <마더>로만 김혜자의 연기를 접했는데 이렇게 보니 색다르다. 이 사람만의 독특한 연기 스타일이 있다. 부르르 떨며 이야기하는
느낌. 다행히 이 영화에서는 과잉된 느낌이 없었다.
대포의 사정이 정확히 표현되지는 않지만, 자유롭게 살아가는 노숙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부끄러워 딸을 그동안 만나러 가지 못 했다. 돈이라는 가치보다 다른 사람의 간절한 마음을 보고 무료로 기계를 수리해 주기도 한다. 도움만 받는 존재였던 지소의 조언에 언젠가는 딸을 만나러 갈 지도 모르는 식으로 결말을 열어놓음. 등장 장면이 그리 많지 않고 정보도 적지만 이 영화에서 사건 진행에 가장 큰 역할을 하는 캐릭터. 바람처럼 떠나가는 영웅 같은 이미지.
한줄 정리.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너무 판타지스럽다. 청소년 소설이 원작이라서
그런지 착한 사람은 너무 착하게 나온다. 이대로만 세상 일들이 잘 풀린다면 좋겠다.
전체관람가용 ‘그리움을 이겨내는 방법’ 별 7/10개.
<리얼> (2) 남은 부분을 확인하고서, 잡지에 실을 글
<리얼>
제작비는 115억, 손익분기점는 300만명, 그러나 관객수는 47만에 그친 영화가 있다. 나는 모두가 알고 있지만 아무도 안 본, 아무도 안 봤지만 모두가 알고 있는 바로 그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리얼>(Real)
2016 한국 청소년 관람불가
액션,느와르 상영시간:137분
개봉일:2017-06-28 누적관객:470,107명
감독:이사랑
출연:김수현(장태영) 성동일(조원근) 외
아시아 최대 규모의 카지노를 둘러싼 거대한 음모와 전쟁 “나와 똑같이 생긴 놈이 나타났다”
카지노 ‘시에스타’ 오픈을 앞둔 조직의 보스 장태영(김수현) 앞에 암흑가 대부 조원근(성동일)이 카지노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나타난다. 조원근의 개입으로 카지노를 빼앗길 위기에 처한 장태영은 자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투자자를 찾아 나선다.
어느 날, 이름뿐만 아니라 생김새마저 똑 같은 의문의 투자자(김수현)가 나타나 자금은 물론 조원근까지 해결해주겠다는 제안을 한다. 의문의 투자자의 등장으로 조원근과 카지노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시작되고 이들을 둘러 싼 거대한 비밀과 음모의 정체가 서서히 드러난다.
오직 진짜만이 모든 것을 갖는다! (출처: 씨네21)
(물론 영화 진행방식이 줄거리와 다소 거리가 있다.. 하지만 이 영화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글을 읽는 데에 그리 중요하진 않기 때문에 대충 이런 영화구나 정도로만 알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내세울 것이 없어서일까 오로지 설리의 베드신만으로 홍보를 했기에 나는 이 영화의 실패를 어느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몇가지 이유가 있어서 개봉 첫날에 극장에서 <리얼>을 관람하고 말았다.
첫번째로 나는 설리의 노출이 궁금했다. 그동안 기획사가 시키는 대로 무대에서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고, 예능에 나와서 적당히 소녀스런 모습을 보이던 걸그룹의 멤버인 설리가 돌연 아이돌 활동을 중단한 이후에 직접 베드신을 찍다니. 나는 그녀가 이전과 너무 상반되는 행보를 보여서 깜짝 놀랐다. 충격적이면서 새로운 소식이었다. 그녀를 감싸고 있던 아이돌이라는 두터운 포장지가 벗겨지는 순간을 나는 하루라도 일찍 마주하고 싶었다.
두번째로 영화가 망작이라는 걸 사전에 알고 보면 나름의 특이한 재미가 있다. 이 영화가 좋은 영화인지 나쁜 영화인지 골치 아프게 판단할 필요 없이 비웃을 수 있다는 것이 망한 영화의 거의 유일한 장점이다. 그래서 영화 자체보다 영화를 보고 화가 난 관객들의 평이 더 재미있는 경우가 많다. 관객은 거의 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리얼>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건 영화보다 재미있는 감상평들이 인터넷에 쏟아지기 때문일 것이다. 문제의 영화를 직접 보면 그 유머의 흐름에서 남다른 우위를 차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영화의 작품성이 경악스러운 수준일수록 사람들의 입에 더 많이 오르내리는데, 그렇게 되면 일단 티켓값은 한다. 내가 영화를 보러 간 당일 아침 일찍부터 <리얼>이 조리돌림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약간의 흥분 상태에 돌입했다.
세번째로 사람들이 다들 망작이라고 칭하는 영화에서 의외로 괜찮은 구석을 찾아내는 재미가 있다. 보물찾기 하는 느낌이다. 도시에서 물이 콸콸 나오는 수도꼭지를 트는 것보다 사막에서 목이 말라서 죽어가다가 오아시스를 찾았을 때가 더 좋다고 하면 다들 내 마음을 이해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영화감독이 되고자 하는 꿈을 위해 이 거대한 실패를 직접 극장에서 마주하고 타산지석으로 삼고 싶었다. 적어도 기대하고 봤다가 애매한 퀄리티에 실망하게 되는 여느 영화들보다는 <리얼>이 내게 좀 더 흥미로운 실패 사례였다.
그런데 맙소사, 영화가 너무 별로였다.
첫번째 문제는 가뜩이나 꼬인 이야기를 너무 어렵게 풀어나간다는 점이다. 관객들이 영화의 흐름을 따라가는 데 있어 꼭 필요했던 부분들을 이 영화는 과감한 건지, 멍청한 건지 그냥 삭제해 버렸다. 이사랑 감독은 관객들이 이 영화를 보고 ‘뭐지?’ 하는 아리송한 느낌을 갖게끔 의도했다고 한다. 참으로 놀라운 패기가 아닐 수 없다. 아무리 그래도 나는 영화가 최소한 알아들을 수 있게는 만들어져야 한다고 본다.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1부 ‘탄생’을 보고 대다수의 관객들 역시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대체 뭘 본 거지?’ 역시나 시작부터 위태로웠다.
두번째로 대본이 너무 경직되어 있다. 내가 들은 배우들의 대사는 전부 어색했다. 그래서 연기 자체도 지켜보기가 너무 불편했다. 보통 사람들이 살면서 한 번도 안 쓰는 단어, 말투로 대사를 쓰니까 이런 문제가 생긴다.
세번째로 액션 씬을 되게 못 찍는다. 이 영화의 장르는 액션 느와르이다. 그런데 액션을 못 찍는다? 말 다했다. 정확히 한시간을 기다려서야 나오는 첫 액션 씬은 최악이다. 칼을 든 괴한들이 자동차 안의 장태영(김수현)을 습격하는 장면이었는데, 카메라가 자동차 주위를 어수선하게 뱅뱅 돈다. 가뜩이나 조명이 어두워서 누가 누구인지도 구별이 안 되는데, 눈에 힘을 주면 겨우 볼 수 있는 배우들의 움직임마저도 차체가 다 가려서 말 그대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후 악당 소굴에서의 액션 시퀀스는 타격감이 매우 구리다. 귀를 의심케 하는, 살면서 처음 들어본 구린 소리가 타격음으로 삽입된다. 또 여기서 모든 악당들은 한 명도 빠짐 없이 장태영의 펀치 한 번에 나가떨어진다. 그러다가 원펀치 액션이 채 끝난 것 같지도 않은데, 어중간한 지점에서 편집을 해서 바로 악당 소굴이 불타는 장면, 그리고 건너편 건물에서 태연하게 두 명의 장태영이 대화를 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안 맞는 장면들을 억지로 이어붙인 것이다. 이쯤하니 꽤 너그러운 나도 남은 부분이 어떻게 돌아갈지 확실히 예상이 갔다. 그래서 나는 러닝타임을 한시간 남기고 바로 극장을 나와버렸다. 티켓 값이 아까웠지만 나는 중간에 나왔기 때문에 60분 정도 되는 시간을 번 것이다.
승리자의 기분으로 인터넷에 올라온 <리얼>의 평들을 읽어보는 것도 잠시, 영화가 내 예상을 뛰어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많은 이들이 문제삼는 영화 끝부분의 충격적인 액션씬 때문이다. <리얼>의 티켓을 끊어놓고도 그 엄청난 장면을 보지 못 했다는 점은 마음 속의 짐으로 남았다. 그러다 이번 기회에 고려대학교 내 방송국 KUBS에서 매주 화요일 저녁 5시 반부터 6시까지 방송되는 [시네:망]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리얼>을 다시 보게 되었다. 잘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인생의 궁금증 하나쯤 해결하는 것이 그리 나쁘게 느껴지지만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미처 보지 못 했던 <리얼>의 후반부로 끌려왔다.
그런데 반전이 있었다. 모두가 경악했던 영화의 후반부에서 의외로 괜찮은 점 하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오아시스를 찾다 포기한 내가 드디어 오아시스를 발견한 것이다! 이렇게 쥐어짜낸 장점 하나보다 앞서 언급한 단점들이 훨씬 강력하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내게 항상 나쁘게 대하다가 가끔 잘 해주는 사람한테 마음이 가는 것처럼.. 아무튼 그렇게 받아들이면 될 것 같다.
장점 하나가 바로 볼거리이다. 더럽게 재미없는 영화지만 시각적인 부분에서는 꽤 많은 공을 들였다는 것을 모두가 오프닝부터 알 수 있을 것이다. 비록 화려한 쓰레기일지라도.. 그 화려함에서 오는 시각적 쾌감만은 인정한다.
첫번째 볼거리는 배우이다. 이 영화에서 관객들이 주목하는 배우는 딱 두 명일 것이다. 김수현과 설리이다. 김수현은 어떤 영화에서도 이렇게 러닝타임 내내 등장한 적이 없고, 맡고 있는 역할조차 다양하기에 그의 얼굴만 봐도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면 만족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김수현과 설리 두 사람 모두 기존의 이미지를 깨고 파격적인 노출까지 감행했다. 이들의 노출이 내용 진행에 꼭 필요한 것이었는지는 몰라도 이 부분에서 관객들이 원하는 것은 충분히 보여주지 않았나 싶다.
두번째 볼거리는 색조명이다. <리얼>처럼 비현실적인 공간에서 벌어지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다루는 영화라면 보통의 영화에선 허용되지 않는 특이한 조명을 칠 수 있다. 덕분에 영화에 담긴 밤의 도시는 붉은색과 청록색 계열로 떡칠되어 반짝반짝 빛이 난다. 이미지가 너무 과잉되었다는 시선도 있지만, 나는 오히려 화려한 이미지가 시원시원하게 지나가는 것이 좋았다.
마지막 볼거리는 바로 신개념 액션이다. 세상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새로운 액션 시퀀스가 바로 결말부에 나온다. 장태영은 카지노를 공격하는 악당들을 마약에 취한 채로 말도 안 되는 방법으로 때려눕히는 환상에 빠진다. 이번에는 펀치가 더 강력해진 건지, 악당이 벽까지 날아가서 벽이 산산조각이 나버린다. 장태영은 이제 총에 맞아도 저절로 치유까지 된다. 드래곤볼을 상상하면 될 것이다.
그러다 수족관의 유리가 깨지고 카지노가 물바다가 되면서 <리얼>을 불구덩이로 내몰았던 그 악명높은 ‘발레 시퀀스’가 나온다. 장태영은 이제 붉은 양복을 입고 발레를 시작한다. 동작 하나하나가 액션이 되고, 장태영의 몸이 채 닿지도 않은 악당들이 여기저기 나가떨어진다. 끝까지 치닫는 극의 진행때문에 극장은 웃음바다가 되었을 것이 뻔하다. 하지만 장면 자체는 볼만했다.
이 장면은 어떤 영화에서도 시도할 수 없는, <리얼>이기에 가능했던 장면이다.
하지만 정도껏 해야 한다. 이 영화에 헛되이 시간과 노력을 바친 인재들이 차라리 김수현과 함께 15초 정도의 짧은 광고를 만들었다면 반응은 정반대였을 것이다. 아니 그냥 이중인격 어쩌고 하는 이야기는 다 집어치워버리고 김수현, 설리의 2시간짜리 영상 화보집을 만들었어도 이것보단 나았을 것이다.
내용은 이해하려고 해봐야 어차피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딱히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쓴 시나리오 같지도 않다. 그저 김수현을 데리고 중국에서 외화벌이를 하고 싶었나 보다. 당연히 해외시장에서도 일은 잘 안 풀렸다.
나는 볼거리를 이 영화의 장점으로 뽑았지만 누군가가 이 영화의 예쁜 장면들을 모은 편집본을 유투브에 올린다면 당연히 그걸 보는 게 낫다. 안 올라온다면 그냥 페이스북에 떠도는 ‘기분 좋아지는 영상’ 류의 것을 보는 것도 좋다. 젤리를 자르고.. 정리정돈하고.. 기계가 돌아가고.. 이런 영상 말이다. 결론은 이것이다. 액체괴물 동영상을 137분 보는 게 더 낫다. (액체괴물 비하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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