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 31일 화요일

<추격자> 안타까움


<곡성>을 보기 전에.





이 영화에 담긴 정서를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안타까움이다.
그 안타까운 순간들.. 안타까움의 연속이다.
플롯을 주무르는 솜씨가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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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영민의 살인 동기는 불분명하게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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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잡한 그 상태에서 바로 영화를 끝내버리는 것.
영화 내용과는 다르게 묘하게 깔끔하다.

<도니 다코> 불가해함에서 오는 알 수 없는 매력






두 번 봐도 이해못할 영화는 이해 못 하겠더라.
무슨 정신으로 만들었는지 모를 정도로 이 영화가 하는 이야기는 정말 혼란스럽다.
장면장면들은 재밌지만 그래서 이 영화가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하면.. 하나도 모르겠다.
이렇게 불가해한 것도 매력이라면 매력이지..
감독이 그 매력을 더 잘 주무를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싶지만.

<초속5센티미터> 애매한 느낌뿐이다..




대학에 와서 새로 사귀게 된 친구가 이 영화를 정말 좋아했다.
나는 그 친구를 만나기 얼마 전 <초속5센티미터>를 재미없게 봤던 차였다.
이 영화에 대해서 한동안 열심히 이야기하던 것이 생각난다.
재미는 없었을지라도 조금 특별한 영화가 되어 다음에 나를 다시 찾아오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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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신카이 마코토의 '그림'에 그닥 감흥을 받지 않는다.
이건 극장에서도 그랬다. 그냥 그런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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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이야기. 기차가 계속해서 연착되는 답답한 상황의 내레이션을 통한 감정묘사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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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쏟아졌다. 집중을 못 했다. 세 가지 이야기가 연결된 하나의 이야기였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하지만 집중하지 않은 내 쪽을 변명하자면, 주제에 대해서 딱히 할 말이 없어 주변 이야기로 에둘러 표현한 게 아닌가.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말하는 영화를 좋아하지만, <초속5센티미터>는 알 듯 말 듯한 느낌뿐이다.
그러나 좀 더 집중하고 봤더라면 이 점을 오히려 이 영화의 장점이라고 여겼을 듯. 영화를 '느낀다'는 거.. 정말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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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은 떠나고 없다. 다른 몇몇 영화들에서도 반복되는 구조. 별 특별할 것 없더라..
(그럼에도 이 점도 좀 더 집중하고 봤더라면...~~~)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아직도 모르겠다

2월 1일에.



홍상수 데뷔작. 어째서인지 너무 다시 보고 싶었다.
하지만 집중하지 못 하고 봤다.
내가 남겨놓은 메모도 몇 자 안 된다.

섬뜩한 엔딩.
꿈 장면 독특해.
대체 뭘까?


홍상수 영화를 정주행하면서 느낀 건, 예전과 지금 스타일이 이렇게나 많이 달라질 수 있는가이다.
그런 감독이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것도 꽤 신기하다.
그의 세계는 어떻게 변화했는가. 알 것만 같았는데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다시 보니 미궁에 빠진 것만 같다.
다음에 '이해할 수 있을 때' 다시 보기로!

<디센트> 밝은 동굴 속, 알 것만 같은 적들과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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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들을 계속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로 남겨두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첫 전투부터 너무 대놓고 조명에 온 몸을 드러낸다.
약점이 너무나 분명하기에 후반부에 내세울 건 물량밖에 없다.
공포를 주는 방식도 너무 얄팍하다.
괴물들이 공격해 오는 건 그때그때 필요할 때만.
두려움에 떨기보단 아무리 영화라 해도 성립 불가능한 개체들이란 생각만 계속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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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들은 너무 도구적으로 쓰인다.
개성없이 여기서 하나 줄거나 하나 더해도 차이 없을 캐릭터들.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초반 30분은 정말이지 시간이 아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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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소한 공간 내에서 프레임 안에 담을 수 없는 것들을 너무 많이 담으려 했기에
억지스럽고 부자연스런 CG들이 많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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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이라는 무시무시한 공간을 놓고서
그 공간이 주는 제약을 영리하게 돌파하려는 시도가 보이지 않았다.
어두운, 미지의, 위험한 공간. 길을 알 수 없는 공간.
좋은 건 다 취하면서 동굴의 칠흑같은 어둠이나 협소한 공간 같은 것은 부정하려는 것이
바로 영화의 주 무대인 동굴을 외면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2016년 5월 28일 토요일

<남과 여(1966)> 설득력이 없는 사랑


1월 30일에.





사랑의 당위성이 안 느껴졌다.
남자와 여자는 어떻게 사랑에 빠지게 되었는가.
남자와 여자는 왜 사랑했어야만 하는가.
관객에게도 사랑에 빠질 여지를 달라.

<비기너스> 음악만 남은 재감상



친구와 아카이브에서. 보고싶었던 영화 <테이킹 우드스탁>이 없어서 고민하던 중 OST가 많이 맴돌던 <비기너스>를 보았다.

Stardust
Beginners Theme Suite

감상은 지난번 보았을 때보다 좋지 못 했다.
조금 더 졸렸고 지난번과 다른 것을 보지 못 했다.
두 번째 감상이 좋지 않아 한동안은 음악만으로 기억될 것 같다.

<언프렌디드: 친구삭제> 형식은 참신하나 나머지 모든 면에서 진부하다



82분이 리얼타임 랩탑 화면으로 진행되는 공포영화. 방금 전까지만 해도 관객들이 통제할 수 있었던 익숙한 모습의 화면이 영화 속 등장인물 한 명에 의해 컨트롤된다. 보고 끄는 것이 자유로워 보이는 인터페이스가 역설적으로 관객은 극에 절대 개입할 수 없다는 사실을 돋보이게 한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이제는 화면을 조종하는 그녀 이외의 또 다른 존재가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본격적인 공포가 시작되는 순간은 관객의 대리자 역할을 했던 블레어 릴리도 무능력한 처지에 놓이는 때이다.

하지만 <언프렌디드: 친구삭제>는 참신한 형식 이외에는 딱히 건질 것이 없는 영화이다. 좀 더 잘 만들면 괜찮았을 거라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그 아쉬움을 내용과 형식적 기교 면에서 털어놓는다.

가장 큰 실망을 불러일으킨 건 내용이다. 하나도 새로울 것이 없다. 만취한 동영상이 인터넷에 올라와 자살한 여학생의 원혼이 이에 가담한 이들을 죽인다는 내용이다. 징벌의 과정만을 강조하기 때문에 의미를 전달하는 솜씨도 매우 투박해 보인다. SNS 공간의 쓰임에서도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친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형식 상에서는, 좀 더 시도해 볼 것이 많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다. SNS 공간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 한 것도 그렇지만, 노트북 화면 속 남는 공간을 좀 더 활용했더라면 기억에 남는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우리는 주로 <언프렌디드: 친구삭제>의 화면 속 창 안의 작은 프레임에 주로 집중했지만, 남의 노트북을 훔쳐보는 듯한 긴장감은 보여주려 의도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공간은 좀 더 영리하게 쓰일 수 있었다.

형식 상의 일관성이 보이지 않는 부분들. 노트북 주인인 블레어 릴리가 어디에 집중하느냐에 따라 소리가 뮤트되기도 한다. 원하는 곳으로 관객들을 집중시키기 위한 선택이었겠지만 이것이 영화를 만드는 이들의 개입이라고 느껴져 몰입도가 떨어졌다. 긴장감을 조성하는 효과음도 나오지만, 연출력만으로 승부를 보는 것이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로라 반스가 등장해 노트북을 덮는 장면도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컸다.

2016년 5월 22일 일요일

<조디악> 두 가지 해결되지 못한 궁금증

새로 들어간 동아리에서의 첫 영화.
즐거운 시간이었다. 오길 잘했어~
영화 볼 때는 그닥 집중하지 못 했던 것 같은데
여러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까 영화를 좀 더 열심히 본 느낌이다.


딱히 특별한 것이 없는데도 잘 찍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돌출된 것 없이 그저 장면장면 공을 들였기 때문일까
다른 분은 <조디악>을 정석적인 영화라고 했다.
정석적인 게 뭐지 싶으면서도 어느정도 맞는 말인 것 같다.
나는 이 영화를 '사실성'으로 정리해 보았다.



이야기하고 싶었으나 흐름을 깨기 싫어 하지 못한 말.

중반부에 기자가 갑자기 아무 말도 없이 완전히 사건에서 빠져버린다.
그러다 갑자기 등장해 버린다.
이것을 명백히 나는 시나리오상의 실수라고 생각했다.
다른 이들의 생각은 어떤지?

영화가 끝나면서 '그 후로 블라블라' 하면서 자막이 엄청 많이 뜬다.
불필요해보이는 것까지 다 담으면서 왜 영화는
하필 영화에 담긴 그 순간까지만을 다루었을까?
그 이후로 벌어진 흥미로운 일들은 담지 않고
딱 영화에 나온 거기까지만 담은 것의 의도가 궁금하다.

2016년 5월 16일 월요일

<셜리에 관한 모든 것> 이미지가 영혼 없이 멋질 수 있을까



SSG 광고를 보고 이 영화가 떠올라 바로 찾아보았다.
영상 자체는 혁명적이라 부를만큼 참신하고 멋지지만
한시간 반의 러닝타임을 몰입하며 볼 수 있을 만큼의 스토리텔링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가느다란 서사에 몸을 지탱하던 영화는 끝내 졸음을 불러온다.

그림같은 영화.
이 영화에는 그림이 움직인다는 것 말고도
미술관에 가서 그림을 감상하는 것과의 큰 차이가 있다.
어떤 그림을 얼마나 오랫동안 볼 것인지 선택할 권한이 관객에게 없다는 것.

다시 말하지만 영상 자체는 정말 멋지다.
이 스타일을 짧은 이미지를 전달해야 하는 CF에 적용할 생각을 하다니.

<어둠의 표적> 답답한 샘 페킨파


샘 페킨파의 폭력적인 영화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어둠의 표적>은 예전에 봤던 <가르시아>와는 많이 다른 영화였다. 이 영화는 많이 답답하다. 후반부에 강한 카타르시스를 주기 위해 불쾌함을 조성하는가 싶었지만, 모든 일은 찝찝하게 마무리된다. 이렇게까지 해서 악인을 지켜낸 주인공을 보고선 참 고집스럽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어느 쪽의 편에도 서기 힘들었다. 그 자체로 불쾌함을 가져다 준다.

<펀치 드렁크 러브> 산만한 폴 토마스 앤더슨



<마스터>도, <매그놀리아>도, <펀치 드렁크 러브>도. 폴 토마스 앤더슨은 대체 왜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스타일로 낯선 사건을 풀어나간다. <펀치 드렁크 러브>의 경우,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 여자형제들 사이에서 눌려 사는 남자 주인공, 폰섹스 업체와의 악연이나 푸딩 항공사 마일리지가 대체 왜 필요했는가. 논리적 영역과는 다른 차원에서 폴 토마스 앤더슨 자신만의 감각으로 만들어진다고 해야 할까.
미야자키 하야오같은 느낌이다. 분명히 논리적으로 설명되어야 할 것들까지 '느낌'으로 넘어간다. 이러다가 자칫하면 영화가 산만해질 수 있다. 사랑에 대해 말하는 듯 싶으면서도 딴소리가 너무 많았다. 아쉽게도 난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에서도, 폴 토마스 앤더슨의 영화에서도 매력을 느끼지 못 했다. <펀치 드렁크 러브>에서 하나 예를 들자면, 영화 속 사랑은 '느낌'으로 한번에 다가왔지만 내겐 등장인물들과 사랑에 빠질 시간이나 분명한 계기가 필요했다.

펑펑 터지는 듯한 소리. 밝고 선명한 조명. 쉴새없이 나오는 사운드트랙.

지금까지 보았던 폴 토마스 앤더슨의 영화는 이상하고 재미가 없었다. 언젠쯤 나의 감각과 폴 토마스 앤더슨의 감각이 일치하는 영화를 보게 될 수 있을까.


<블루 벨벳> 참 이상한 데이빗 린치의 스릴러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내게 어떤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진 않았다. 왜 하필 영화 속 악당이 그런 캐릭터여야만 했는가, 왜 하필 이 영화에 변태성욕이 주 소재로 쓰였는가 하는 의문. 이런 의문들이 들 필요 없이 그 자체만으로 매력적이었다면 좋았을 것을. <블루 벨벳>은 그 자체로 기묘한 그림이다.

데이빗 린치의 영화는 볼수록 빠져든다. 그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서 내가 말을 좀 더 배워야 될 것 같다. 이번 영화는 다른 영화들에 비해 대충은 알 것 같다. <블루 벨벳>을 다시 훑어보며 특징들을 몇개 정리해 보았다.
인공적인 느낌이 강한 세트장과 조명.
불안함을 자아내는 사운드.
상황과 반대되는 분위기의 음악.
꺼져버리는 촛불, 조명 인서트.

평범한 일상 속 우리가 보지 못 했던 깊고 어두운 이면.

2016년 5월 5일 목요일

<프라이멀 피어> 반전을 위한 희생


친구가 정말 좋아해서 같이 본 영화.



결국 영화는 그렇게 끝났다. 애런에게 애런이라는 아이는 사라지고 없었다. 애런은 이미 폭력적인 자아 로이에 잠식당한 뒤였다.

베일은 반전을 맞닥뜨리고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 한다. 사실 그가 믿는다는 '성선설'도 이 영화에선 되게 얄팍하게 쓰였지. 사람이 본디 선하다고 해서 아무도 나쁜 일을 저지르지 않는 것이 아니다.

선한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 근원적인 악은 어디서 오는가?

성선설이라는 괜찮은 소재를 끌어다놓고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하며 반례 하나 제시하는 것이 이 영화의 전부다. 나머지는 글쎄.. 반전을 위해서 도구적으로 쓰인 감이 있다. 캐릭터들은 진짜 캐릭터로 존재하지 못하고 딱 자기 역할만을 위해 기계 부품처럼 움직인다.

90년대치고 올드한 스타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