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7월 30일 일요일

<마터스: 천국을 보는 눈> 수단이 목적을 잠식하다. 애초에 목적이 뭐였는지도. 그저 수단만이 중요했는지도.



고어영화 보기 소모임에서 두 번째로 감상한 영화.
보고 있기가 불편한 영화였다.
거대한 산을 하나 넘은 느낌이다.

감독은 여럿이서 이 영화를 함께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는데
대체 우리가 나누었으면 하는 이야기가 어떤 것인가 하고 계속 생각하며 보았다.
영화는 단순하다.
전반부에서는 고문 피해자가 가해자 일가족을 살해한다.
후반부에서는 고문 피해자의 친구가 붙잡혀 고문을 당한다. 고문을 가하는 집단은 사람에게 엄청난 고통이 가해지면 사후세계에 다녀올 수 있다고 믿는 집단이다. 고문을 당한 주인공은 무언가를 보고 집단의 수장에게 귓속말을 한다. 수장은 자기가 들은 것을 발표하기로 한 날 자살한다.

영화를 만든 사람이 끔찍한 악취미를 가졌다고 생각했다.
오랫동안 지하에 감금되어 있던 사람의 머리에 박힌 헬멧에서 못을 뽑아낼 때 너무 끔찍했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이 장면이 영화에 꼭 필요했을 거라고 보기가 어려웠다.
없어도 영화 감상에는 아무 문제 없다.
이 장면은 그저 표현을 위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이 장면이 고어영화 팬들을 위한 서비스 컷이라면 얘기가 조금 달라진다.
-관객을 흥분시키려는 목적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관객을 흥분시키는 것은 무엇을 위해서인가.
---잔뜩 흥분한 관객들에게 "그 뒤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을 때려박기 위해?
----흠.... 악취미군.....

결말은 관객들이 사후세계에 대해 생각하게 하기 위한 것보다는
애초부터 이렇게 끝내려고 만든 것 같았다.
물론 이랬을수도 있다. 끝나지 않는 고문을 당하며 주인공이 생각해낸 것은 바로 순교자인척 집단의 수장의 자살을 유도하는 증언을 하는 것!
하지만 앞부분에서 주인공이 보는 환상에 대한 단서를 몇 단계에 걸쳐 제공했던 이 친절한 영화가 갑자기 이렇게 맥없이 끝나버리는 것은 많이 이상하다.
쭉 구사해오던 자기 화법으로는 도저히 영화를 제대로 끝맺을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이 영화보다 잔인한 것을 많이 봐왔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인지 이 영화는 보고 나서 많이 힘들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긴 하나 이 영화를 다시 볼 생각은 근 시일 내로는 없다...
다음 소모임 감상영화는 아마도 <세르비안 필름>이 될 것 같다.....

<내 책상 위의 천사> 재미의 늪


새로운 동아리에 가 보았다.
<피아노>를 연출한 제인 캠피온 감독의 <내 책상 위의 천사>를 멤버들과 같이 보았다.
도저히 몰입을 할 수가 없는 영화였다.
눈만 뜨고 영화를 보는 내내 어서 끝났으면 했다.
짧은 영화는 아니지만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기다림이 끝나고 다같이 얘기를 하는데, 이 영화를 향한 극찬이 터져나와서 더 짜증이 났다.
똑같은 시간 들였는데 나만 빼고 남들은 좋았다니~~~

누군가에겐 꽤 괜찮은 영화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약간 들기는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이 영화에 대해 생각하기를 꺼린다.
전기영화에 대한 진지한 얘기가 많이 나왔는데 내가 인정할 수 있는 건 딱 <조디악>정도까지인 것 같다.
-그런데 <내 책상 위의 천사>와 <조디악>의 차이점은.. 한 쪽이 장르영화라는 점.. 또 있나 다른 것이?

한 사람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이 영화는 수많은 사람들을 스쳐지나가듯 등장시켰다.
하긴 우리의 삶도 두세시간의 영화 안에 담기가 어렵지.
그래서 몇몇 영화들은 주인공 주위 인물의 수를 한정시키기도 하지.
<내 책상 위의 천사>는 그런 영화가 아니다.
주인공 주위 인물들이 지닌 스토리 일부를 보여주지 않기도 하고, 주인공이 느끼는 감정의 원인을 보여주지 않기도 한다.
누군가는 우리 인생도 하나의 결과를 놓고 한 가지 원인에 의해서만 일어났다고 볼 수 없지 않느냐라며 영화를 변호했지만
내가 영화를 만든다면 그렇게까진 하고 싶지 않다.
인생이 그런 단순한 인과로는 벌어지지 않는다는 그 철학에는 동의하지만 이렇게까지 표현할 일인가 싶다.
재미가 없다.
요즘 영화를 재미로 보기 때문에 재미없는 영화를 견디기가 너무 힘들었다.
여기서 재미란 무엇인가.
지금 내가 내릴 수 있는 정의에 따르면 "영화를 계속 보고싶어지게 만드는 힘"이다.
더 깊은 곳까지는 아직 생각해보지 못 했다.
<내 책상 위의 천사>의 전반부에서 인과를 맞추며 무언가 이해하려는 내 노력은 좌절되었고 주인공이 커가고 장소를 옮겨갈 때는 정신을 놓게 되었다. 꽤 일찍부터였다.

<피아노>에서 제인 캠피온의 스타일을 봤는지 안 봤는지 기억이 나질 않지만
<내 책상 위의 천사>만 놓고 봤을 때는 무지 개성없게 느껴졌다.
감독의 손길이 하나도 안 보인다고 생각했다.
인물에 대한 그 사람의 애정이 안 느껴졌다.
이 주인공 얘기를 굳이 해야 했을 이유가 안 보였다.
누군가는 꼭 애정이 있어야 그 사람에 관한 영화를 만드는 건 아니지 않느냐고 했지만
나는 절대 그런 식으로 영화 만들고 싶지 않다.
영화 만드는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리는데 그 시간을 애정도 없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위해 바친다니. 생각만 해도 괴롭다.
-다르게 본다면 애정있는 시선을 읽어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데 역시나 다시 볼 생각은 전혀 없다.

<그 후> 불타오르고 남은 재같은



옛날부터 홍상수 영화 정주행을 하고 있어서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 이후로는 매번 극장에서 그의 신작들을 관람했다.
이번이 극장에서 본 홍상수의 세 번째 영화이다.

영화 볼 때는 별로인데 끝나고 나면 뭔가를 남긴다.
영화가 별로라고 느낀 이유는 대사가 별로였기 때문이다.
권해효는 알바를 하러 온 김민희에게도, 다시 찾아온 김민희에게도 똑같이 세세한 가족사를 묻는다.
그런데 우리는 알바생을 뽑을 때도, 자기를 찾아온 그 어느 누구에게도 이정도로 자세한 것은 묻지 않을 뿐더러 그런 질문에 일일이 대답해 주지도 않는다.
홍상수가 일상적인 대화법을 몰라서 이런 장면을 반복하는 건 아닐텐데, 그렇다고 그 이유가 영화에서 보이지는 않는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의 창문 닦는 남자처럼, 홍상수 감독은 그냥 이런 마음에 걸리는 것들을 집어넣었다고 말할 것 같다.
이렇게 누구나 마음에 걸리겠지만 해결할 수 없는 장면들을 집어넣어놓고 그걸 관객에게 맡긴다는 건 무책임하다고 생각한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를 보고 나서는 어리둥절했지만, 이제는 불쾌한 장난처럼 보인다.

<그 후>를 본 내게 남은 것은.
무언가 끝나버린 뒤에 오는 텁텁하고 건조한 감정이다.
권해효는 김새벽과의 사랑 때문에 가족도 포기하고 체면도 포기한다.
그러나 시간이 얼마 흐르고 김민희가 출판사를 다시 찾았을 때의 권해효는 아무렇지도 않게, 마치 체념한 듯 행동한다.
권해효는 결국 김새벽과 자신이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헤어진 것일까?
아니면 자기 자식을 버릴 수 없어서 김새벽과 헤어진 것일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영화는 보여주지 않는다.
그 사랑이 끝나버린 뒤의 아무렇지 않은, 아니면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권해효의 얼굴, 말투를 보여준다.
그것을 보고 나니 좀 슬퍼졌다.
이별을 겪고 나면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단점이 명확해서 주저할 수도 있다.
권해효의 아내와 김민희의 싸움은 영화가 그 장면에 내어주는 긴 시간에 비해 재미도 없고 별 의미도 없다.

특별한 점이 하나 있다.
아마도 김민희는 홍상수의 영화에서 처음으로 종교에 관한 대화를 했을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의 도올이 무슨 얘기를 했는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홍상수 감독은 최근의 영화들과 자기 사생활이 일절 관계 없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걸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
떳떳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홍상수의 영화를 보며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어느정도 이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다.
<밤과 낮> 이후로는 그냥 보기만 하는 것 같다.
최근작들은 성공률이 그렇게 좋지도 않다.

[꽃들에게 희망을] 오랜만에 펼쳐본 동화



누워있다가 갑자기 생각이 났다.
애벌레 기둥이 생각이 났다.
[꽃들에게 희망을]은 어릴 때 내가 정말 좋아하던 책이다.
평범하게 살지 말고 특별하게 살아야겠다는 내 인생 목표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초등학교 때 서너명이서 독서논술할 때 읽었던 것 같다.
그 때 이 영화의 교훈을 난 이런 식으로 정리했었다.
"애벌레 기둥에 올라가지 말아야지."

그리고 중학교 졸업할 때쯤에 학교에서 버리는 책들을 주워오다가 이 책도 함께 가져온 것 같다.
그래서 군데군데 얼룩이 묻고 너덜너덜한 이 책을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다시 읽었다.
글씨가 약간 많은 동화라고 보면 된다.
작가가 바라보는 인생에 대한 우화이다.
모두가 그 끝을 알 수 없는 애벌레 기둥의 꼭대기를 보기 위해 서로를 밟고 올라간다.

"제기랄, 꼭대기에 아무것도 없잖아!"
그러자 꼭대기에 있던 다른 애벌레가 대꾸했습니다.
"바보야, 조용히 해! 저 밑에 있는 친구들이 듣잖아. 그들이 올라오고 싶어하고 있는 곳에 우리가 와 있는 거야. 여기가 바로 그 곳이야!



이 책 한 권이 내 인생의 방향을 결정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좀 웃기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 어린 애한테 개성을 일러주다니..
지금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게 받아들일 것 같다.
짧고 단순해야 하는 동화라서 그런지 딴지를 걸고싶어지는 부분이 있었다.

우리 인생에도 애벌레 기둥같은 것이 있다.
지금까지 내가 살면서 느낀 애벌레 기둥은 바로 공부이다.
앞으로는 돈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끝에 아무 것도 없었던 애벌레 기둥과 달리 공부를 잘 하기 위한 경쟁, 돈을 벌기 위한 경쟁 끝에는 보상이 주어진다.
남을 이겼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는 경쟁으로 무엇이 있을까? 게임? 그러면 그 재밌는 게임을 하지 말아야 하나? 그런데 이 책을 '게임을 하면 안 되겠다'고 읽는 건 너무 과하지 않나?
우리 인생에서 기둥에서 벗어나 나비가 된다는 것 무엇일까?
그 답은 못 찾겠다. 내 안에 숨겨진 것은 뭐지? 영화를 하는 것? 예술을 하는 것?
오랜 시간이 지나서 다시 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지금, 내가 참 삐딱하게 컸다는 생각이 든다.

남들 다 하는 거 잘 생각해 봐라. 의미가 없는 것이라면 가차없이 버려라.
그리고 자기 안에 있는 "무언가"를 일깨워라.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는 앞으로 좀 더 생각해 볼 일이다.
나의 개성? 나의 개성은 뭐지?

2017년 7월 28일 금요일

2017BIFAN <싱크로나이자> 모든 면에서 완벽히 기대를 빗겨나간다



딱 기묘한 이야기 급의 상상력과 기술력이다. 어느 면에서나 영화제에 오면 안 됐을 정도로 수준 미달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오프닝에서부터 그냥 아무 방이나 잡고 실험실이라고 구라를 치는 것을 보고 답이 나왔다.

치매라는 소재 때문에 큰 기대를 걸었지만 별 것 없었다. 뇌파 동기화가 어째서 그런 기능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신체의 자가 치유 능력을 극대화한다. 그래서 주인공이 실험하던 그의 어머니가 점점 어려지고 이내 주인공과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하나가 된다. 끝맺는 솜씨도 매우 서툴고 던져주는 메시지는 없다. 굳이 영화로까지 만들 필요는 없었다고 본다.

2017BIFAN <미르싼> 이 영화에는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농담식으로 이렇게 말한다. 삼라만상, 인간의 온갖 희로애락이 담긴 영화라고. 발리우드 좀비 영화라는 신선한 조합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인도 영화답게 온갖 것을 다 때려박는다. 코미디도 있고 스릴러도 있고 멜로도 있고 액션도 있다. 모든 것의 타이밍은 완벽하다. 진짜 화끈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속편을 예고하면서 끝이 난다. 속편도 무조건 극장에서 필수 관람이다. 올해 BIFAN에서 건진 최고의 영화 중 하나.

2017BIFAN <데이브 미로 만들다> 옆사람을 조심하라, 부분이 전체를 잡아먹다




옆 사람의 웃음소리는 영화를 보는 데에 큰 영향을 미친다. 하나도 안 웃긴데 옆 사람이 슬슬 웃기 시작한다면 그 영화는 최악의 기억이 될지도 모른다. 내 옆 사람들은 진짜 하나도 안 웃긴 장면에서 열심히 웃어댔고,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너무 좋은 영화를 추천해줘서 고맙다며, 역대 최고의 GV였다고 칭찬을 하면서 나갔다.
가장 불만스러웠던 것은 영화 내에서 다큐멘터리를 찍는 사람들. 이들이 다큐멘터리를 왜 찍어야 하는지 관객들에게 납득시키려고는 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큐멘터리를 찍는다는 행위에 많은 인물을 투입해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이것을 통해서 웃기려고 노력한다. 진짜 쓰잘데기 없는 시간이었다. 그냥 다큐멘터리 찍는다는 그 인물들만을 가지고 영화 한 편을 만들어보는 게 낫지 않았을까. 영화의 소재인 미로만으로는 영화를 꽉 채워낼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미로를 잘 꾸며놓아서 미술적으로는 독특하고 매력있지만, 장면 장면을 이어붙이니 이 공간들이 모두 이어져 있는 하나의 공간처럼은 느껴지지 않는다.

내 옆 사람들을 생각할수록 화가 난다. 생각보다 세상엔 웃음이 헤픈 사람들이 많다. 이 영화를 집에서 혼자 보았다면 그냥 예쁜데 못 만든 영화로만 기억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2017BIFAN ScreexX 판타스틱 단편 걸작선 <집으로> <티비 첼로> <페노미나> <엄마> <볼트: 체인시티> 개똥작 파티







<집으로>
액션이 기술적으로 매우 빈약하다. 스토리도 매우 부실하다. 서울역 DVD 발매할 때 특별수록 영상으로 넣으면 딱일 듯. 스크린 X의 장점을 살린 건 한쪽 면에서 얼핏 보이는 좀비 실루엣. 사방 어디에서 좀비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좀비물 장르에는 꽤 어울리는 기술인 것 같다.



<티비 첼로>
백남준의 이야기를 하나 싶었는데, 별 이유 없이 애인을 벗겨서 무대 위에 세우려고 설득하는 멍청한 예술가의 이야기이다. 그의 예술관이랄 것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고, 여자는 뜬금없이 옷을 벗고 무대에 서기로 결심한다. 배우들 연기 스타일도 하나로 뭉치지 않아 집중이 안 된다. 스크린 X를 시야의 확장으로만 쓰지 않고 한 피사체를 다각도에서 보여주는 용도로 쓰는 건 매우 흥미로웠다.


<페노미나>
좆같았다. 사운드가 지 혼자 미쳐 날뛴다. 억지로 긴장감을 주기 위해 처음부터 끝까지 배경음악을 큰 소리로 집어넣는다. 나는 하나도 긴장이 안 되는데 사운드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다 한다. 스토리텔링 능력은 최악. 짧은 단편에 이것저것 집어넣으려고 하는데, 나는 왜 이런 내용의 이야기를 봐야 하는지 하나도 납득이 되지 않는다. 벌레를 다루는 능력이라거나, 아버지가 광신도라서 아들을 학대한다거나 하는 건 그저 설정을 위한 설정. 스크린X 영화에 써 보겠다고 이 영화에 투자되었을 돈이 너무 아깝다


<엄마>
엄마라는 일반명사를 이 영화에 내주기에는 좀 아깝다. 어머니의 죽음을 앞둔 아들이 어머니와의 옛 기억을 회상한다는 이야기. 그저 그렇다. 별 느낌이 안 들었다.






<볼트: 체인시티>

원래 VR 체험존에서 상영하는 영상이라고 한다. 스크린XVR 기술을 저렴한 가격으로 극장에서 선보이는 기술인 것 같다. VR을 뛰어넘는 것이 스크린X의 관건인지도 모르겠다. 영상 시작 전에 이런저런 자막이 나오는데 하나도 필요없다. 자막만 봐서는 이해도 안 되는 내용이고, 영화에는 내용이랄 것이 없다. 무슨 이동수단을 타고 이리저리 막 날아다니는 내용이다. 기술적으로 뛰어나서 시각적 쾌감을 느꼈다.

2017BIFAN <제인 도> 부검이라는 소재, 웰메이드



추천이 많았던 영화답게 정말 좋은 선택이었다. 좋은 영화를 보면 웃음이 나오고 행복한 기분이 든다. 이 영화가 딱 그랬다. 극장에서 개봉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좋겠다. 하지만 스포일러에 취약한 영화라서 개봉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사람들이 자세히 모르는 사체 부검이라는 과정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매우 흥미로웠다.
이 영화는 공포영화 공식에 따라 관객의 긴장감을 유발하는 걸 아주 잘 한다. 내가 아주 잘 만들어진 공포영화를 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영화를 보는 게 무서우면서도 기쁘고 즐거워 웃음이 지어진다.

과학적인 부검 이야기에서 갑자기 오컬트로 내용이 확 바뀌어 버리는 건 좀 실망스러웠다. 그래도 영화가 숨기고 있는 비밀이 뭘까 추리하면서 보는 과정이 매우 즐거웠다.

2017BIFAN <미트볼 머신> 일본의 뒤틀린 설정들, 잔인하지만 느슨한 장면들


영화가 끝나고 미트볼 머신 고토쿠 제작진들과 배우들이 와서 GV를 했다. 외국인이 온 GV는 처음이라서 통역 때문에 진행이 두 배 느려지는 것이 좀 짜증났다.
데려온 여자배우가 예뻤는데 감독이 배우 가슴을 가리키면서 고토쿠에 가슴 노출이 있으니 비교해서 봐주시면 될 것 같다는 농담을 했다. 이렇게 글로 옮기니까 왠지 심각해 보인다. 하지만 여배우가 불쾌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권력관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웃어넘긴 건 아닌가~ 하고 이의제기를 한다면 딱히 할 말은 없다. 그 때 난 그 농담을 일본 문화의 한 모습이라고 받아들였다.
영화에서 마음에 들었던 것은 특유의 뒤틀린 설정들이다. 주인공은 건너편 공장의 여공을 짝사랑한다. 그래서 그녀를 상상하면서 자위를 한다. 주인공이 다니는 공장의 동료들은 항상 여자 따먹는 얘기에 혈안이 되어 있고, 주인공은 그것이 불편하지만 싫은 티는 내지 않는다. 아직 동정인 그에게 돈 주고 섹스를 할 기회는 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우연히 그는 자기 동료로부터 겁탈당하려던 여공을 발견해 거기 뛰어들지만 흠씬 얻어맞기만 할 뿐이다. 여자는 주인공의 집까지 따라와서 자기가 예전부터 주인공을 짝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힌다. 둘은 섹스를 하려 하지만 주인공이 여자의 몸에 난 흉터를 보고 멈칫한다. 그때 네크로보그가 난입해 여자와 섹스하고 그녀의 몸을 강탈한다. 남자는 네크로보그에 정신이 지배당한 여자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또다른 네크로보그와 한 몸이 되어 그녀를 찾아간다. 모든 것이 이상하다. 우리나라 영화에서 이런 내용은 본 적이 없다. 앞으로 일본 영화를 볼 때는 다른 나라 영화에서는 보지 못 했던 이런 뒤틀린 면들에 집중해서 보아야겠다.

잔인한 표현들을 기대하고 갔지만 정작 마음에 든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피가 솟고 몸이 터지고 하는 장면들은 많지만 특수분장 티가 많이 나서 그리 무섭게 느껴지진 않았다. 또한 영화는 잔인한 장면들을 만들어 보여주는 것 자체에만 집중하지, 그것을 통해서 관객의 긴장감을 서서히 고조시키는 데에는 관심이 없는 듯하다. 그래서 보기에 잔인하다고 느끼기에 잔인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하나 배웠다.

2017년 7월 9일 일요일

<맵 투 더 스타> 난해하고 이상하다



신체를 변형하던 <비디오드롬>, <더 플라이>가 생각나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작품 하나를 골라서 보았다.
얼마 전에 <리얼>이라는 영화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격분했는데,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맵 투 더 스타>가 그 영화보다 나은 게 어디있나 싶다.
그 정도로 영화가 개판이다.
헐리우드를 배경으로 배우들의 이야기를 하는가 싶었더니 이내 가족사와 얽혀 난해하고 개연성 없는 결말을 맞는다.
왜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각본을 정말 못 썼다.

<개를 문 사나이> 페이크 다큐멘터리의 한계에 대해서



후배 한 명과 고어영화 보기 소모임을 하나 개설했다.
아직은 그 친구와 나 단 두 명이다.
처음으로 함께한 영화는 내가 추천했던 <개를 문 사나이>
이 영화는 사람을 갑작스럽게 놀라는 효과 없이도 무서움을 주는 영화이기 때문에 갑툭튀 장면들을 못 보는 그 친구에게 잘 맞을 것 같았다.

<개를 문 사나이>를 가지고 할 이야기는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았다.
명쾌한 영화들이 바로 그렇다.
<개를 문 사나이>는 말하고자 하는 바도 명확해 보이고, 딱히 다르게 볼 만한 여지도 없다.
내가 생각하는 <개를 문 사나이>는 성찰 없는 카메라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면서 관객들의 반성을 유도하는 영화이다.
막상 고어 장면이 나와도 그 이미지 자체에 대해 할 말이 별로 없을텐데, 이 영화는 그런 장면들조차 별로 없고 컬러로 찍히지도 않아 시각적 쾌감이 좀 덜하다.
모임의 취지와 잘 맞지 않는 영화 선택이었던 것 같다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본다면 항상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내 원칙이다.
<개를 문 사나이>는 두 번을 봐도 비슷한 영화이지만, 이번에는 후배와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다른 생각을 해 보게 되었다.
이 영화는 절대로 페이크 다큐멘터리라는 형식을 지울 수 없는 영화이다.
이 영화에서 카메라의 존재가 없어서는 이야기 진행도 안 되고 메시지 전달도 안 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형식적 특성을 잘 이해한 영화들이 좋다.
이런 식으로 페이크 다큐멘터리가 아니면 안 되는 영화들!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영화들!

<클로버필드>, <파라노말 액티비티>로 접한 페이크 다큐멘터리는 재미있고 신선했다.
<클로버필드>라는 영화의 형식이 특히 매우 사실적으로 다가와서 한동안 이 영화에 마음을 빼앗기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를 많이 보기 시작하면서 관객을 100% 속일 수 있는 페이크 다큐멘터리 영화란 없다는 아쉬움으로 인해, 그리고 페이크 다큐멘터리라는 형식이 남용되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관심이 줄었다.
페이크 다큐멘터리가 관객을 완벽히 속일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로는 일단 그 내용이 말도 안 되는 영화들이 많다는 것이다.
또 관객의 흥미를 위한 극적인 편집이 오히려 사실감을 떨어뜨린다.
이러한 문제점은 지금까지 내가 보아온 페이크 다큐멘터리 영화 모두에서 발견되었다.
적당히 현실적이면서도 페이크 다큐멘터리라는 형식을 갖다대기에 적합한 내용이란 무엇일까?

'모큐드라마 싸인'이라는 어느 프로그램이 생각난다.
현실고발 다큐의 탈을 쓴 페이크 다큐멘터리 TV 프로그램이다.
일부러 자극적이고 꼬인 내용으로 만드는데, 가짜 티가 많이 나지만 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속을 만하다.
내용이 조작된 것이라는 자막이 뜨긴 해도 이런 식이라면 사람들을 속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TV가 아니라 돈을 내고 선택해 영화를 보는 극장이라면 사람들이 한번쯤은 영화에 대해 미리 조사를 하고 볼 것이고..
페이크 다큐멘터리라는 장르가 100% 페이크가 되지 못 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일까..
페이크 다큐멘터리가 영화보다 TV에 적합한 장르일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자료를 좀 더 찾아봐야겠다.

<더 비지트> 어린 아이와 노인의 페이크 다큐멘터리 공포


<개를 문 사나이>를 보고 나서 페이크 다큐멘터리에 대해 생각하다가 마침 우연히 본 영화가 <더 비지트>였다.
<더 비지트>는 공포영화이지만 가족에 대한 다큐멘터리라는 형식이 함께하기 때문에 독특한 매력을 준다.
관객들의 호불호가 많이 갈렸을 만한 장면 중 하나가 모든 일이 끝난 뒤에 어머니가 아이들에게 아버지에 대한 미움을 내려놓아도 좋다는 교훈을 전하는 장면이다.
매우 뻔하고 오글거리는 결말이지만, 이 결말이 있었기에 다큐멘터리라는 형식을 온전히 끝맺을 수 있었다.

반전을 모르고 봤기에 매우 좋았다.
이 반전 하나가 노출되면 <더 비지트>가 별 것 없는 공포영화로 보일지도 모른다.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삼고 그들이 싸우는 적들을 혈연으로 이어진 할아버지 할머니로 설정한 것이 매우 흥미롭다.
아이들은 온갖 비상식적인 일들을 겪지만 상대방이 노인이라는 이유로, 한 집에서 생활하는 가족이라는 이유로 이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는다.


간만에 공포영화를 보았다.
자극적인 공포가 별로 없어서 좋았다.
요즘은 이렇게 장르영화 보는 게 재밌다.

<옥자> 봉준호이기 때문에 아쉬운 거겠죠?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학교 내에 있는 극장에서 <옥자>를 보았다.
나는 영화를 보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봤어."
그리고 영화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고 나서는 옥자가 어떻냐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봤는데 아쉬움이 좀 있어요.."

영화를 본 직후 친구와의 대화로 돌아가서.

1.
나는 옥자를 구출하려는 단체 ALF와 옥자를 이용하려는 미란도 회사 각각의 입장이 균형있게 제시된 것 같다고 말했지만 친구는 갸우뚱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ALF보다는 미란도 회사 쪽의 논리에 설득당했기 때문에 그렇게 봤던 것 같다.
고통받는 동물들을 해방하려는 ALF의 이야기는 꽤나 멋지게 들리지만 나는 그들의 생각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는 못 했다.
개체 수로만 따지면 한 마리 생명으로 더 많은 양의 고기를 제공하는 슈퍼돼지를 먹는 게 평범한 돼지를 먹는 것보다 낫지 않은가?
이들에겐 슈퍼 돼지 박람회를 망쳐놓음으로써 퍼뜨릴 정치적 메시지가 이 시간에도 도살되는 평범한 돼지들의 생명보다 값진 것이었나?
슈퍼 돼지를 구출하려 애쓰는 그들을 보니 그렇게 맛있다는 슈퍼 돼지가 한 입 먹고싶어졌
다.
미란도 사가 이루려는 목표에 대한 설득보다 오히려 ALF의 목표 설득이 부족했다.

2.
미자와 옥자의 사랑은 간단하다.
미자는 옥자를 사랑하고, 옥자도 미자를 사랑한다.
오프닝부터 영화는 이들의 사랑을 열심히 납득시키려 들고, 나도 납득되었다.
미자에게는 옥자를 구하러 미국으로 갈 이유가 있다. 이해가 된다.
그런데 이렇게 심플한 스토리는 봉준호 치고는 많이 실망스럽다.

3.
봉준호의 <괴물>은 대한민국이 괴물과 가족들에게 대응하는 사회적인 이야기와, 잃어버린 딸을 찾으려는 가족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모두 잘 소화해냈다.
하지만 봉준호의 <옥자>는 ALF와 미란도 사가 대립하는 사회적인 이야기, 미자와 미란도 사가 옥자를 두고 대립하는 개인적인 이야기 양 쪽에 있어서 미흡했다는 생각이 든다.

4.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장면. 봉준호가 말하던 삑사리가 이거구나! 했던 장면이 있다.
미자가 미란도 사 카운터 앞의 통유리에 몸을 던지는 장면.
통유리는 한 번에 깨지지 않고 요란하게 진동하다가 잠시 뒤에 와장창 무너져내린다.
좀 있으면 미자가 유리에 몸을 던질 것이 명백한 상황 -> 그러나 유리는 깨지지 않는다. 휴 놀랐네! -> 하지만 방심한 사이에 유리가 무너져내린다.
관객을 쥐락펴락하는 데에는 꼭 엄청난 기술이 요구되는 것만은 아니다.
이런 식으로 하면 된다.
어차피 깨질 유리, 돈도 안 들고 시간도 얼마 안 든다.

미자의 할아버지는 미자에게 있어서 소중한 사람으로 나오지만, 동시에 옥자를 팔아넘겨서 미자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이기도 하다.
내가 원했던 것이 이런 인물상이다.
우리 모두가 자신이 악역이라는 자각은 하지 않고 살아가지만 가끔 누군가에게 잘못을 저지르곤 한다.

미란도 사 직원 역으로 나온 최우식 캐릭터는 정말 쓸데없었다.
사대보험 얘기를 하지만 영화는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 듯하다.
어설픈 관심이 오히려 영화의 통일성을 해치는 경우.
얼마나 큰 동기였는지는 모르지만 미란도 사에 보복을 하려는지 그가 ALF에 가입한다는 결말 또한 어이가 없었다.

루시 미란도라는 캐릭터와 낸시 미란도라는 캐릭터.
일부러 1인 2역을 시켜가며 쌍둥이 캐릭터를 만들어냈지만 영화는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 한다.




ALF와 미란도 사의 대립이 사회적인 이야기였다면, 옥자와 미란도 사의 대립은 개인적인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직업의 분업으로 인해 우리 삶이 나아진 이유 중 하나로 직접 우리가 고기를 얻기 위해 손에 피를 묻힐 필요가 없다는 점이 있다.
물론 동물의 죽음이란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원한다면 고기는 얻으면서 동물의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부터 완전히 차단될 수 있다.
영화는 고통받는 슈퍼 돼지들을 보여주면서 

자기 자신만 실천해도 좋을 신념을 남들에게 강요한다는 것은 그만큼 자기 신념이 강하기 때문일 텐데,

미란도 회사가 질 좋은 고기를 저렴한 가격에 널리 공급하는 데 성공한다면 굶어죽는 사람들이 줄어들 거라 말하는데, 

미란도 회사가 슈퍼 돼지의 가격을 저렴하게 유지한다면 정말로 그들이 원하는 기아 문제에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전세계에서 고통받는 수많은 동물들을 뒤로 하고 

전세계에서 고통받는 수많은 생명들을 뒤로하고 굳이 미란도 사의 옥자 한 마리를 구출하려 애쓰는 데에는 어떤 정치적인 의도가 있었을 거라고 보는데 설명이 미흡했다.
동물의 개체 수로만 따져 봤을 때 수많은 동물들을 구하는 것보다 옥자 한 마리를 구하는 게 낫다고 

미란도 사에서 사육해서 도살하는 슈퍼 돼지를 영화 속 인물들은 참 맛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