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 휴관 안내-
그동안 극장을 사랑해주신 관객 여러분께 안내 말씀 드립니다.
영화관은 내부 사정으로 인해 당분간 휴관하게 되었습니다..
여기는 고등학교 때 하복 입고 다니던 짧은 머리의 내가, 내가 퍼부었던 열정이 고인 곳.
그렇게도 즐겨 다니던 영화관인데 바로 오늘이 마지막 상영이라고 한다.
언젠가부터 여길 오는 게 뜸해졌지.
한가한 요즘보다 한창 공부하기 바쁘던 고3 때 더 많이 오던 곳이다.
나는 지금 뭐가 그렇게 바쁘길래?
요즘은 귀찮다고 읽지 않는 씨네21도 그 때는 매주 2시간씩 시간을 들여 정독했었다.
지금 하라고 하면 의욕이 없어서 못 하겠다.
지금은 없는 힘이 어디서 났을까 그 때는.
오늘 무슨 영화를 틀어준다고 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극장 주인이 아주 어릴 때 즐겨보던 영화 몇 편을 틀어주고 끝낸다고 하는데 영화 제목이 기억이 안 난다. 별로 안 유명한 영화였던가?
상영작 이름을 인터넷에서 미리 보고 온 것 같은데.. 생각이 안 난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극장에 내렸다.
극장은 내가 기억하던 그 모습 그대로인데 사람은 아무도 없다.
멀쩡히 내일도 운영할 수 있을 만큼 시설에는 문제가 없어보인다.
[오늘 티켓은 돈을 받지 않습니다.]
여러 편을 상영한다는데 티켓은 하나만 끊어도 되는지 모르겠다. 이따가 물어보든지 해야겠다.
얼굴이 지워져 있는 직원이 가볍게 허리숙여 나를 맞아준다.
몽롱한 기분이다.
여기 상영관은 단관이라 그가 나를 따로 안내할 일은 없다.
아무 얘기 없이 상영관으로 들어간다.
극장 안에도 역시 사람이 없다.
영화관 중심에 있는 자리에 앉았다.
더 올 관객이 정말 없는지 불이 꺼지고 영화는 시작한다.
<도약선생>
오늘의 첫 영화는 도약선생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은하해방전선>을 만든 윤성호 감독이 그것보다 나중에 찍은 영화이다.
본 것은 이 영화가 먼저이다.
이 영화가 좋아서 윤성호 감독의 <은하해방전선>도 찾아보게 된 것이다!
그 때 처음으로 감독 위주로 영화를 보는 법을 배운 것 같다.
윤성호 감독의 영화들은 다 비슷비슷하게 좋았다.
윤성호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안 만나봐도 알 정도로 그의 영화들은 그같았다.
한 감독이 여러 작품에 걸쳐 자기 세계를 표현한다는 게 내겐 매우 매력적로 다가왔다!
윤성호 감독 영화의 특징은 콩트식 각본이다.
뼈대가 되는 중심사건이 없다.
그 대신 캐릭터들 사이의 단발적인 농담이 영화를 이끌어간다.
그만큼 영화가 산만하지만, 캐릭터를 구축하거나 상황을 연출하는 아이디어가 신선해서 좋다.
대사도 잘 쓴다. 자기 특징을 잘 살려서 이 사람은 영화 몇 편을 내놓다가 웹드라마 시장으로 가버렸다.
<도약선생>은, 가수 전영록의 외모를 빼다박은 좀 엉뚱한 전영록 코치와 그에게 장대높이뛰기를 배우는 두 소녀의 이야기이다.
제자 나원식. 오랜 룸메이트와 헤어진 그녀는 옛 룸메이트에게 크고 늠름한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장대높이뛰기를 배워보기로 한다.
제자 박재영. 그녀는 학창시절 전영록 코치에게 달리기를 배우다 키가 안 커버려서 달리기를 그만뒀었다. 지금은 아이돌 가수가 되기 위해 연습생 생활 중인데 전영록 코치의 꼬드김에 못 이겨서 장대높이뛰기를 배워보기로 한다.
이 영화에 나오는 그 누구도 진지하게 장대높이뛰기를 할 생각은 없어보이고, 장대로 높이 뛰는 장면도 안 나온다.
그나마 이 사람들이 하는 훈련이 ‘사자자세’인데, 무릎을 꿇고 이상한 표정을 짓는 것이 전부이다.
그러다가 후반부에선 감성 트레이닝을 위해 시를 배우고, 등장인물들이 쓴 시와 갑작스런 결말이 오버랩되며 농담처럼 영화는 끝이 난다.
황당무계한 영화이다. 그런데 나는 이 영화가 좋다.
영화 곳곳에 깔리는 인디밴드 9와숫자들의 나른한 음악이나 꽤 귀여운데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나 갑작스레 툭 치고 들어오는 서정적인 감성이나 이것저것이 다 내 취향이다.
이렇게 특이하디 특이한 윤성호 감독의 세계를 보면서 난, 이런 스타일은 아니더라도 나도 언젠가 ‘나’스러운 영화를 만들어 보이겠다 다짐했었다.
그런데 ‘나’스러운 건 뭘까? 나의 세계란 뭘까?
윤성호 감독을 보며 영화감독의 꿈을 키울 시절에는 내가 나 스스로 많이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점점 시간이 지나며 깨달았다. 나 스스로가 그다지 특별한 사람은 아니란 걸!
영화를 통해서까지 그렇게 거창하게 표현하고픈 나의 세계는 아직 발견하지 못 했다.
영화는 하고 싶다고 주위에 떠벌렸지만 정작 내가 무엇을 만들어야 할지, 영화를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건지는 아직까지도 전혀 모르겠다.
나의 가치관, 나의 사고방식을 녹여낸 영화가 좋을 것 같다.
그런데 그걸 녹여서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는건지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대사도 드럽게 못 쓴다.
영화가 끝이 났다.
러닝타임이 66분밖에 안 돼서 너무 좋은 영화다. 나는 이런 짧은 영화가 좋다.
크레딧이 다 올라가고 불이 켜졌다. 진지한 표정의 극장 주인이 앞문에서 나와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극장 주인입니다.”
그의 말을 들을 관객은 여전히 나밖에 없었다.
“오늘이 임시휴관 전 마지막 상영이라 많이 놀라셨을 겁니다. 내부 사정이란 게 말이죠… 그…..”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은 고심 끝에 영화의 꿈을 접기로 했습니다. 이유야 여러가지를 들 수 있겠죠. 그런데 얼마 전에 제가 깨달은 게, 제가 예전만큼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돈이 없어도 좋았습니다. 내가 했던 영화가 부끄럽게 느껴져도 좋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예전만큼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알았습니다. 떠나야 할 때가 왔습니다. 그 좋아하는 영화도 이제는 의무감에 보는 느낌이고, 최근에 있던 두 번의 지루한 영화 경험은 영화에 대한 흥미를 거의 잃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이젠 제가 영화를 왜 좋아했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극장의 막을 내리기 전에 제가 한때 정말 좋아했던 영화들을 오늘 여러분과 함께 보고 싶었던 겁니다. 첫 번째 영화는 어떠셨나요? 마음에 드셨다면 좋겠지만… 음… 바로 다음 영화 가겠습니다.”
할 말이 떨어진건지 관객이 너무 적게 와 당황한건지 주인이라는 사람은 말을 하다 말고 마이크를 내려놓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쉬는시간 없이 바로 다음 영화가 시작했다.
<노킹 온 헤븐스 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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