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 23일 토요일

1. 나의 이야기를 하겠다

자기 이야기를 그대로 시나리오에 담는다는 것에 대해 큰 거부감이 있었다. 자기 얘기를 하기 위해서 영화를 만든다는 게 너무 자기만족적이라고 여겨서 그랬던 것 같다. 지금도 그리 다르지 않다. 여러 사람이 봐야 하는 영화에 자기 이야기를 한다라..
얼마 전 시나리오 같이 쓰는 형의 글을 읽어 보았다. 그 형 글엔 자기 이야기가 많았다. 시나리오가 나쁘진 않았는데 난 마지막에 "너무 자기 얘기를 하는 건 좀 그런 것 같아요" 하고 덧붙였다. 그런데 잠시 생각해 보니 자기 얘기를 하면 안 될 이유같은 건 없지 않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내가 '자기 얘기'를 싫어했던 건 아무래도 그 '자기 얘기'가 실패한 사례를 여럿보았기 때문인 것 같다. 또 내 주위 사람들은 너무 민망해할 것 같다. 내가 내 이야기를 토대로 영화를 만들게 되면 어떻게든 내 시선으로밖에 이야기를 재구성할 수밖에 없는데, 내 이야기 속에 다른 시각을 가지고 등장했던 이들에겐 얼마나 우습게 들리겠는가. 바로 그거다. 내 이야기가 내가 실제로 겪은 일들이었음을 주위 사람들이 못 알아채기만 한다면 그리 민망하진 않을텐데 어떻게든 저 사람들은 알아차릴 수밖에 없지 않나.

되게 민망했던 기억 하나. 어릴 때부터 난 소설 구상에 여념이 없었다. 내가 기억하기론 하나 시작해서 끝을 본 소설이 있긴 했나 싶을 정도로 구상만 했다. 중학교 때, 대지진이 일어난 학교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를 하나 구상하고 있었다. 나와 친했던 친구는 슥 다가와 내 소설의 인물 설정을 보고는 나를 이상하게 보았다.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대부분 같은 반 학우들의 이름을 살짝 비튼 것에 불과했으며, 인물 성격이 딱 그 애들 성격 그대로였던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그 때 내가 구상했던 소설은 나 혼자 주위 애들을 인형삼아 벌였던 망상 놀이쯤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 친구는 그 때의 날 어떻게 보았을지 모르겠으나 나는 나 스스로가 한없이 부끄러웠다.
가끔씩 내가 겪었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나는 그 사건의 당사자가 영화를 볼지도 모른다는 무시무시한 상상에 바로 그 생각을 접는다. 나의 경우에는, 모든 저작물이 스트레스에서 나온다. 언제나 나는 사람으로부터 스트레스를 받아 왔고, 내가 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다고 하면 대부분이 누구와의 안 좋았던 기억들의 재현일 것이다. 둘이 싸우면 어느 한 쪽의 얘기만 들어서는 절대 그 사건 전체를 볼 수 없다. 어느 부분은 전달되는 과정에서 크게 왜곡되기도 한다. 나는 그 어느 한쪽의 이야기를 살면서 여러번 들어왔고 그 사람들의 분노에 찬 눈빛을 무시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딱 하나 지금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그 사람들이 무척 한심하게 보였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나도 누군가에게 이런 식으로 한심하게 보이는 걸 원치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끝내기에도 좀 섭섭하다. 나는 내가 겪은 일밖에 모른다. 앞으로 무슨 영화를 만들게 되든 결국엔 내 이야기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될까? 남의 각본으로 만들면 끝나는 문제일까? 근데 그렇게 생각해 보면, 그건 내가 영화를 하고자 했던 이유를 무시하는 선택이 된다.
일단 내가 경계하고 있는 것을 피하기 위해선 영화에서 남의 뒷얘기를 하면 안 된다. 지금까지 나의 거의 모든 영화는 스트레스에서 나왔지만 내 주위 사람에게 상처줄 일만 안 하면 되지 않나.
아니 또 근데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건 남의 뒷얘기를 뺀다면 할 수 없는 얘기가 아닌가..

그래서 일단 내가 정말 피하고자 했던 이야기 방식을 택해보겠다. 나중 되면 이런 얘기는 두번 다시 못할테니 지금 해 두는 게 좋을 것 같다. 하고 싶은 걸 일단 해 봐야지... 혹시 어쩌면 이게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나쁘지 않을 수도 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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