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으며 순간적으로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구절들을 정리해 본다. 다른 날 다른 기분으로 읽으면 전혀 다른 구절이 또 내 마음을 흔들지도.
수조 안을 고요히 헤엄쳐 다니는 엔젤피시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아무 생각 없이 몇 시간을 바라보아도 싫증 나지 않는다. p 25
"뭐라고요? 같이 산책만 해 주면 백만 엔을 주겠다고요?"
"그래."
"그런 말을 누가 믿는답니까? 사람 놀리지 마십쇼."
"딴마음은 없어. 산책하면서 자네가 가 보고 싶은 곳이 있으면 들러도 좋아. 나도 내가 가고 싶은 데를 가 볼 거야. 그런 식으로 도쿄를 천천히 거닐자, 그거야. 아무렴 날치잡이보다는 훨씬 편할걸?" p 33
말하다 보니 다카하시가 생각났다. 그는 죽을 때까지 자기 정신이 병든 원인을 몰랐을지도 모른다. 아니, 알고 있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속으로 분이 쌓이고 쌓여 그런 폭력으로 나타난 게 아닐까. p 69
"자네 그거 아나? 산책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은 바로 도쿄야. 산길을 걷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눈에 띄는 변화가 모자라지. 거기 사는 식물이나 동물은 어제 보나 오늘 보나 그게 그거잖아. 그러니 쉬이 싫증 나지. 헌데 도쿄는 달라. 큰길에서 조금만 들어서도 소음과는 단절될 수 있거든. 반대로 복잡한 소음 속에 묻히고 싶거든 번화가로 나가면 되고." p 74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 살기를 거부하는 건, 인간으로서 즐거움을 포기하는 것과 진배없소. p 97
"저는 꽁하게 속에 쌓아 두는 유형이 아니기 때문에 망상 같은 걸 품은 적은 없습니다. 스토커 짓 하는 사람은 그때그때 풀어 버리질 못하니까 속으로 독이 들어차서 마침내 폭발하는 거 아닌가요?" p 159
그 말과 동시에 미야와키의 왼손이 내 무릎을 타고 사타구니 쪽으로 파고들었다. 순간적으로 등줄기가 잔뜩 눌렸다 튀어오른 스프링처럼 바짝 펴졌다. 미야와키는 오른손으로 매실을 으깨면서 왼손으로 내 사타구니를 만지작거렸다. 소주 속에서 부서져가는 매실이, 그렇게 추잡해 보일 수가 없었다.
"미야와키 씨, 저는 그런 타입이......."
나는 허리를 굽히고 그의 왼손에서 벗어나려 했다. 미야와키가 얼른 손을 치웠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나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말없이 피웠다.
"미안해, 몇 잔 하다 보니 그만 자네가......."
"회사를 그만둔 것도 그 버릇 때문이었습니까?"
"신입 사원 중에 맘에 드는 남자가 있었지. 술김에 그 애를 앉혀 두고 고백했던 게 들통 나서 집사람에게까지 알려지게 됐어."
뭐라 대꾸를 해야 좋을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나는, 막 피워 문 담배를 꺼 버렸다.
"이제 그만 가죠."
미야와키가 끄덕였다.
"잘못했어. 지금 있었던 일은 잊어 줬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p 238
"젊은 사람이 참 정열적이네요. 요즘은 남을 좋아하기도 어려운 시댄데." p 311
"옛날에, 빨간 스커트 자주 입었습니까?"
"응, 그래. 자주 입었지."
마키코의 얼굴에 살짝 빛이 돌았다.
"나, 지금도 빨간 스커트, 좋아해."
나는 눈을 감아 버렸다. 똘똘 뭉쳐 있떤 슬픔이 후욱, 하고 빠져나갔다. p 392
나는 앞으로도 미스즈 생각을 놓지 못할까. 어느 날 문득 마키코의 가게에 슬그머니 얼굴을 들이밀게 될까. 철창 너머의 후쿠하라에게 기운 내라는 편지 따위를 쓰게 될까. p 393
옮긴이의 말
[이렇게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할 만큼 지독히 외롭게 살다가 본능처럼 또 다른 빈 가슴을 찾아 공명하며 동화되길 원하고 결국엔 또 다시 혼자가 된다.] p 397
[친어머니가 떠난 뒤 말라 버린 후미야의 눈물샘. 그 독하게 굳어 있던 눈물샘이 유일한 사랑과 헤어지고,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았던 후쿠하라를 철창으로 보내면서 터져 버린다.] p 397
p 238, 내용상 그리 중요한 부분이 아닌데 여기서 하나의 영감을 받았다. 두 친구가 만나서 얘기하던 도중 한 쪽이 커밍아웃을 하는 상황을 단편으로 만들어보는 것이다.
작년에 찍었던 <문자의-낭만>이라는 단편과 비슷한 느낌의 대화가 되지 않을까 싶다. 영화 속에서 인물이 하는 말은, 내가 하고 싶은 말과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하나의 상황을 제시할 뿐이다.
남자 둘이서 붕가붕가 비슷한 것을 하는 내용이 지난 단편에 있었는데, 어쩌다 이번에 아예 동성애를 소재로 하게 되었다. 본의 아닌 '오해'를 살지도. 내가 아는 한국 게이 감독은 동성애 영화만 찍는다. 아니 그런데 꼭 동성애자만 동성애 작품을 만드는 건 아니지 않나.
- 영화 속 살인자의 대사가 그거 만든 사람이 진심으로 하고 싶은 말은 아닐 거 아니냐.
- 살인자가 나오는 영화를 만든다고 그거 만든 사람이 살인자인 건 아니지 않냐.
(하지만 분명 차이는 존재한다. 내가 상정한 '살인자'는 흔히 장르적인 소재로 별 생각 없이 받아들여지지만, 동성애는 좀 다른 것 같다. 좀 덜 흔한, 특이한 소재이다 보니까 그 소재에 대해 사람들로 하여금 깊이 고민해보게 만든다는 점인가? 그러니까.. 아 무의미한 머릿속 논쟁이다.)
소설 [텐텐]은 미키 사토시 감독의 영화 <텐텐>의 원작이다. 영화 내용이랑은 많이 다르다. 큰 설정만 가져다 완전히 자기 식대로 만들어버리는,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영화화(ex:설국열차). 분위기도 많이 다르고, 이야기의 중심도 많이 다르다.
영화에서 본 그 분위기를 책에서 기대했으나 많이 달랐다. 그래도 뭐 나쁘지 않았다.
21살의 주인공 후미야. 스물한살? 책 속의 그렇게 아쉬운 사랑의 주인공이 스물 한살이었다니.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다.
책을 읽다가, 누군가의 대출 확인증이 하나 툭 하고 나왔다.
대출일 10월 18일.
두 권을 빌린 사람인데, [텐텐] 그리고 [레스토랑 체리의 계절]이다.
예전에 읽었던 소설 [밑줄 긋는 남자]처럼, 어떤 메시지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텐텐]을 읽은 사람은 이 책과 함께 어떤 책을 읽었을까 궁금한 마음이 들어
나중에 여유 있으면 [레스토랑 체리의 계절]을 읽어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