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1월 15일 화요일

<더 랍스터> 극단적인 전제 with 글을 쓰려는 세 번의 시도


모든 것이 각본가에 의해 짜여 돌아가는 빈틈이 없는 영화에는 매력이 없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재미가 없다.
인간미가 없다.
중간에 무의미한 걸 꼭 넣어줘야 한다는 게 아니라
애초에 불가능한 전제를 알면서도 제시했다는 것은 그렇게 해서까지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뭔가가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그 뭔가를 이야기하려는 작가의 말은 그다지 들어주고 싶지 않다.
거만하다. (이것이 나만의 상상일지도)

<더 랍스터>는 못 만든 영화는 아니다. 그런데 절대로 좋아할 수가 없겠다.
머리로만 만든 영화다.
굳이 영화로 볼 필요가 없었다.
딱히 날카롭다고 하고 싶지도 않고 사랑에 대한 비관이 나는 애처롭게 보인다.

하지만 서사극을 싫어하는 건 아니다.
비슷하게 작가가 관객 머리 위에서 놀려는 영화로 <퍼니 게임>이 있는데 나는 이 영화를 정말 좋아한다.
그런데 <더 랍스터>에 비해서 그 영화는 좀 기발하고 충격적이었다.
생각해 보니 두 영화를 제대로 비교해볼 필요도 없이 나는 <더 랍스터>의 그 말도 안 되는데 볼거리도 안 되는 그 설정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극단적인 전제가 마음에 들지 않아 <더 랍스터>를 볼 생각이 없었다. 이 영화의 비현실적인 설정들은 모두 작가가 하고 싶은 말에 의한 것이며, 작가의 생각에 어긋나는 게 나온다는 건 상상할 수가 없다.



1. <송곳니>를 만든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영화다. 원래같았으면 절대 안 볼 영화였지만, <더 랍스터>에 대한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어서 보게 되었다. 두 영화 모두 극단적인 전제를 바탕으로 한 우화, 절제된 화면과 연기가 특징이다. 그의 영화를 보지 않으려던 이유는 재수가 없어서였다. 얼마 전에 플라톤의 책을 읽다 만 것도 비슷한 이유이다. 두 개의 자아가 아닌 작가 한 명의 자아가 짜고 치는 문답법처럼,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극단적인 화법은 예상 밖의 무언가에 대한 기대를 할 수 없게 만든다.
며칠간 호텔에서 머무르다 짝을 찾지 못 하면 동물이 되고.. 그 반대편에는 솔로로만 살아야 하는 사회가 있고.. 이러한 비현실적이고 답답한 밑그림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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