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 26일 화요일

<자유의 언덕> 별거 없다.

1월 9일. 영상자료원에서 시간에 쫓기며.




보고 나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문소리와 하룻밤 자는 데 실패한 카세료가 꾼 꿈이다.
별 의미를 넣지 않았겠지만 별 의미를 찾을 수가 없었고
그렇다고 영화가 딱히 재밌는 것도 아니었다.

편지라는 소재를 매개로 시간을 뒤섞은 건 홍상수 세계에서 일어난 아주 큰 변화이지만
그것에 대한 감흥은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았다.
보통 영화에서라면 서스펜스를 자극하는 치밀한 장치로 쓰였을 만한 것이
치밀함이 개입되지 않는 세계에 들어왔기 때문일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느낌이다.

<다른 나라에서>, <자유의 언덕>은 둘 다 주연이 외국인 배우이다.
그들은 모두 한국에 잠시 들른 이방인 캐릭터로 등장한다.
우리나라 사람들과 다른 말을 쓰는 사람이라는 점은 활용하지 않고 있다.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는 홍감독이지만 국내에서는 그의 예술성에 대한 논란이 자자하다.
해외에서는 다른 문화권에서 날아왔기에 더 신비롭게 바라보는 경향이 있지 않을까 싶다.
잘 알지 못 하는 다른 나라 영화다 보니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선 함부로 말하지 않으려는 게 좀 있었을 것 같다.
어쩌면 동양에서 보는 좋은 서구영화, 서구에서 보는 좋은 동양영화에는 어쩔 수 없이 이런 배경이 작용할 수밖에 없는 게 아닌가 싶다.

2016년 1월 25일 월요일

<인 더 풀> 미키 사토시는 왜 뭔가 하려고만 하면 재미가 없을까


도저히 찾아볼 수 없던 미키 사토시의 초기작 중 <인 더 풀>
1월 7일 영상자료원에서 드디어 보았다



현대인의 정신적 질병을 세 명의 환자와 한 명의 의사를 통해 가볍게 그려나간 작품. 언제나 내가 좋아하는 미키 사토시의 '문득 그 장면'은 있다. 수영에 미친 남자주인공이 미처 아내의 마음을 돌보지 못 했었단 사실을 깨닫고 반성하는 장면. 오다기리 조가 마음 속에 응어리진 화를 분출하는 장면.

하지만 영 아쉬움이 남는다. 최근작 <오레오레>가 생각난다. 어두운 내용의 소설을 원작으로 해 미키 사토시만의 장점을 말끔히 닦아버린 그 영화. <인 더 풀>은 그 정도까진 아니지만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나 <텐텐>, <인스턴트 늪>에 비해 재미가 떨어진다. 어두운 분위기도 아니었고 서사 중심의 이야기도 아니었지만, 중심 캐릭터가 너무 많은데다 서로 간의 접점이 전혀 없기 때문에 배우들 사이에서 기대 이상의 케미를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 이유라고 짐작한다. 좋아하는 세 작품에 비해 주제가 명확한 편이지만 오히려 미키 사토시의 영화는 뚜렷한 주제가 없는 쪽이 마음에 든다. 열심히 찾아보았건만.. 아쉽다..

+ DVD로 보았기에 부록을 살펴볼 수 있었다. 미키 사토시의 내레이션과 함께 배우들의 리허설 영상이 들어 있었다. 미키 사토시 감독은 코미디 영화에서 배우들 간의 '합'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꼭 리허설을 진행한다고 한다. 그러게 말이야.. 미키 사토시 작품 속 배우들의 말재간은 이런 데서 나왔구만!

<내부자들>을 보고


정치 부패를 다루는 영화를 보면 기분이 너무 나빠져 <내부자들>을 기피하고 있었지만 생각과는 달랐다. <베테랑> <부당거래>를 보면 속에서 끓어올랐던 분노가 <내부자들>을 볼 때는 한없이 잔잔했다. 잔인함의 강도로 치자면 더하면 더했지 덜한 영화는 아닌데 말이다. 왜 그랬을까.

F 정치 용어.. 사투리..
<내부자들>은 쏟아지는 대사로 정보를 전달한다. 많이 낯설고 어려운 언어들로 인해 상황 파악을 하느라 잠시 애 먹었다. 말이 많은 것이 문제는 아니지만 <내부자들>은 말만 많다. 사실 아직도 잘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다.

F 리듬
감독판이든 극장판이든 하나의 영화로서의 짜임새를 갖추어야 한다. 하지만 내가 본 130분짜리 극장판은 완성체의 느낌이 아니었다. 따라가기 힘든 리듬이었다. 예를 들자면, 사건의 진행을 위한 초석을 까는 과정이 후반부의 진행속도에 비해 너무 루즈하다. 잔인함의 강도에는 단계가 없어 영화 분위기상 흉하게 돌출된 느낌이 크다.

F 대한민국 대한민국.. 몰디브..
정말 수준 낮은 대사들이 있다. 딱 두 가지만 언급하자면, "대한민국 검사", "모히또 가서 몰디브 한잔". 까라면 까는 게 대한민국 검사여~ 이 대사때문에 <내부자들> 진짜 안 보려고 했다. 모히또니 뭐니 하는 말같지도 않은 농담은 이 영화에서 하나도 중요한 것이 아니면서 엔딩을 장식하기까지 하는 엄청난 잘못을 범한다.

<내부자들>은 내게 굉장히 비현실적인 영화로 다가왔다. 아무리 픽션이라지만 표현하는 부정부패의 정도가 너무 과하다(성접대 파티에 신체 절단까지 정치인의 깔끔한 면모란 찾아볼 수 없다). 진짜 정치를 심도 있게 다루기보다는 말 그대로 정치의 탈만 가져다 쓴 느낌이다. 굳이 복잡하게 꼬아놨던 사건은 마지막에 가서 유치하고 허무하게 풀린다(ex 멋진 검사님과 동영상만 있으면 네티즌들이 알아서 해결). 사건의 진행에 있어서 꼭 필요한 부분이 생략된 느낌이 강했다(ex. 논설위원의 잘린 팔이 주목받지 않는 이유).


이런저런 이유로 <내부자들>을 보고 난 뒤 불만에 가득찼지만 <내부자들>은 관객들의 큰 지지를 받았다. 성인 관객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주제와 영화를 가득 채운 배우들의 연기가 이유라고 생각한다. 영화가 세상을 바꿀 필요는 없지만 현실과 접해 있는 악당들을 보며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식으로 정치인들에 대한 적개심만 쌓고 정의는 살아있다고 외치는 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



콩밥도 먹을 만 하고 생각할 시간도 많고 나쁘진 않습니다.

오징어 씹어 보셨죠? 근데 그게 무지하게 질긴 겁니다.

계속 씹으시겠습니까?

그렇죠? 이빨 아프게 누가 그걸 끝까지 씹겠습니까...

마찬가집니다

어차피 그들이 원하는 건 술자리나 인터넷에서 씹어댈 안줏거리가 필요한 겁니다.

적당히 씹어대다가 싫증이 나면 뱉어 버리겠죠.

이빨도 아프고 먹고 살기도 바쁘고...

맞습니다. 우린 끝까지 질기게 버티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나라 민족성이 원래 금방 끓고 금방 식지 않습니까?

적당한 시점에서 다른 안줏거리를 던져주면 그뿐입니다.

어차피 그들이 원하는 건 진실이 아닙니다.

고민하고 싶은 이에게는 고민거리를...

울고 싶은 이에게는 울거리를...

욕하고 싶어하는 이에게는 욕할 거리를...

주는 거죠.

열심히 고민하고 울고 욕하면서 스트레스를 좀 풀다 보면

제풀에 지쳐버리지 않겠습니까?

예...

오른손이요?

까짓것 왼손으로 쓰면 되죠

(<내부자들> 감독판 중에서)

<망각의 삶> 영화 만드는 영화





 나는 영화 만드는 영화를 좋아한다. 예를 들자면 <은하해방전선>, <힘내세요 병헌씨>가 있다. 대부분의 영화 만드는 영화는 영화 만들기를 참 힘들면서도 또 매력적인 과정으로 그린다. 갖은 역경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영화 만들기를 계속하는 이유는 뭘까.
 난 이런 영화들에서 느낄 수 있는 영화 만들기의 흥취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 아무래도 영화 만드는 사람들이 그 영화 만들기의 매력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일 테니까. 거기 표현된 게 실제 영화 만드는 사람들이 느끼는 감흥에 가장 가깝지 않을까 싶다. 직접 찍어보면 뭐가 진짠지 알 수 있겠지..





지금까지 봐왔던 영화 만드는 영화들이 영화 만드는 '사람'에 주목하는 드라마였다면 <망각의 삶>은 영화 만드는 '상황'에 주목하는 코미디이다. 영화를 만들면서 생기는 별 지랄같은 상황들을 다룬 세 개의 에피소드가 '꿈'을 연결고리로 하여 묶여 있다.
매력적인 건 여기서 그리 거창한 의미를 찾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꿈이라는 소재는 어떤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치밀하게 사용된 소재가 아닌, 세 개의 단편적인 에피소드를 하나의 장편영화에 담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나는 이 영화 전반적으로 흐르는 무겁지 않은 웃음이 참 좋다.

기회가 된다면.. 영화 만드는 친구들한테 한 번 보여주고 싶다. 더럽게 힘든 일이 끝나고 하하하 웃으며 함께 털어버리면 딱 좋을 것 같다.





2016년 1월 24일 일요일

<텐텐> 미키 사토시의 순간들


1.






2.



내가 미키 사토시의 영화들을 사랑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장면들 때문이다. 문득 음악과 함께 훅 파고 들어오는 장면들이 있다. 문득. 별 시덥잖은 농담을 하다가 진지해지는 이 순간이 미키 사토시 영화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순간이다.

2016년 1월 23일 토요일

1. 나의 이야기를 하겠다

자기 이야기를 그대로 시나리오에 담는다는 것에 대해 큰 거부감이 있었다. 자기 얘기를 하기 위해서 영화를 만든다는 게 너무 자기만족적이라고 여겨서 그랬던 것 같다. 지금도 그리 다르지 않다. 여러 사람이 봐야 하는 영화에 자기 이야기를 한다라..
얼마 전 시나리오 같이 쓰는 형의 글을 읽어 보았다. 그 형 글엔 자기 이야기가 많았다. 시나리오가 나쁘진 않았는데 난 마지막에 "너무 자기 얘기를 하는 건 좀 그런 것 같아요" 하고 덧붙였다. 그런데 잠시 생각해 보니 자기 얘기를 하면 안 될 이유같은 건 없지 않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내가 '자기 얘기'를 싫어했던 건 아무래도 그 '자기 얘기'가 실패한 사례를 여럿보았기 때문인 것 같다. 또 내 주위 사람들은 너무 민망해할 것 같다. 내가 내 이야기를 토대로 영화를 만들게 되면 어떻게든 내 시선으로밖에 이야기를 재구성할 수밖에 없는데, 내 이야기 속에 다른 시각을 가지고 등장했던 이들에겐 얼마나 우습게 들리겠는가. 바로 그거다. 내 이야기가 내가 실제로 겪은 일들이었음을 주위 사람들이 못 알아채기만 한다면 그리 민망하진 않을텐데 어떻게든 저 사람들은 알아차릴 수밖에 없지 않나.

되게 민망했던 기억 하나. 어릴 때부터 난 소설 구상에 여념이 없었다. 내가 기억하기론 하나 시작해서 끝을 본 소설이 있긴 했나 싶을 정도로 구상만 했다. 중학교 때, 대지진이 일어난 학교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를 하나 구상하고 있었다. 나와 친했던 친구는 슥 다가와 내 소설의 인물 설정을 보고는 나를 이상하게 보았다.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대부분 같은 반 학우들의 이름을 살짝 비튼 것에 불과했으며, 인물 성격이 딱 그 애들 성격 그대로였던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그 때 내가 구상했던 소설은 나 혼자 주위 애들을 인형삼아 벌였던 망상 놀이쯤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 친구는 그 때의 날 어떻게 보았을지 모르겠으나 나는 나 스스로가 한없이 부끄러웠다.
가끔씩 내가 겪었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나는 그 사건의 당사자가 영화를 볼지도 모른다는 무시무시한 상상에 바로 그 생각을 접는다. 나의 경우에는, 모든 저작물이 스트레스에서 나온다. 언제나 나는 사람으로부터 스트레스를 받아 왔고, 내가 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다고 하면 대부분이 누구와의 안 좋았던 기억들의 재현일 것이다. 둘이 싸우면 어느 한 쪽의 얘기만 들어서는 절대 그 사건 전체를 볼 수 없다. 어느 부분은 전달되는 과정에서 크게 왜곡되기도 한다. 나는 그 어느 한쪽의 이야기를 살면서 여러번 들어왔고 그 사람들의 분노에 찬 눈빛을 무시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딱 하나 지금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그 사람들이 무척 한심하게 보였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나도 누군가에게 이런 식으로 한심하게 보이는 걸 원치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끝내기에도 좀 섭섭하다. 나는 내가 겪은 일밖에 모른다. 앞으로 무슨 영화를 만들게 되든 결국엔 내 이야기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될까? 남의 각본으로 만들면 끝나는 문제일까? 근데 그렇게 생각해 보면, 그건 내가 영화를 하고자 했던 이유를 무시하는 선택이 된다.
일단 내가 경계하고 있는 것을 피하기 위해선 영화에서 남의 뒷얘기를 하면 안 된다. 지금까지 나의 거의 모든 영화는 스트레스에서 나왔지만 내 주위 사람에게 상처줄 일만 안 하면 되지 않나.
아니 또 근데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건 남의 뒷얘기를 뺀다면 할 수 없는 얘기가 아닌가..

그래서 일단 내가 정말 피하고자 했던 이야기 방식을 택해보겠다. 나중 되면 이런 얘기는 두번 다시 못할테니 지금 해 두는 게 좋을 것 같다. 하고 싶은 걸 일단 해 봐야지... 혹시 어쩌면 이게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나쁘지 않을 수도 있구..

2016년 1월 22일 금요일

<시리어스 맨> 시리어스 맨이 본 시리어스 맨



나는 정말 심각한 사람이다. <시리어스 맨>은 심각한 사람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심각한 사람들은 좀 기분나빠할 영화'라는 표현을 어디서 듣긴 했어도 그게 나의 과하게 심각한 부분에 도움이 된다면 문제 없다는 생각으로 <시리어스 맨>을 보았다.



래리 고프닉은 상황이 심각하다. 이 일 저 일이 겹치고 겹쳐 정말로 힘든 상황이다. 그런 상황을 좀 더 쉽게 받아들이라는 말이 그에겐 무책임하게 들리는 것이 당연하다. 일은 조금씩 풀려가는가 싶었지만 얼씨구, 진짜 시작은 이제부터다. 이런 상황을 가지고 '모든 일을 단순하게 받아들이라'라는 메세지를 주다니. 어차피 인생은 최악이니까 마음 놓아라.

일단 주인공 래리가 딱히 매사에 의미를 부여하려 든다거나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일들을 굳이 복잡하게 풀어나가려 하지도 않는다. 이런 이야기를 제시하고 '불확실함의 정리'같은 걸 이야기하고 있으니 썩 만족스럽지가 않다.

그리고 매사에 serious한 내가 보기에는 마지막 결말이 이렇게 보인다. 마음 놓아봤자 어차피 인생은 최악이다 (+흥겨운 음악). 영화가 제시한 쪽과는 좀 다르다. 일단 인생이 최악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으나 마음 놓아봤자 어차피 인생은 최악이다 + 흥겨운 음악에는 좀 더 짙은 조소가 있다.

영화의 오프닝으로 돌아가 보자. 쌩뚱맞게 배경은 시대극이다. 배우 한 쌍이 나오며 남자가 만난 랍비를 여자는 귀신이라고 한다. 남자는 이미 그 사람을 집으로 초대했고, 여자는 언쟁 끝에 정체 불명의 남자를 칼로 찌른다. 칼에 찔린 그 자는 웃으며 집 밖으로 나가고, 그렇게 어떻게 됐는지는 모른다. 나는 이것을 랍비를 포함해 고리타분한 해법만을 제시하는 사람들의 말이 사실 쓰잘 데 없는 말이라는 것을 돌려가며 표현한 게 아닌가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게 사실은 별 의미 없이 집어넣은 거라 하더만. 아.. 코엔 형제 안 맞아.


<시리어스 맨>에는 Serious Man이라는 표현이 여러 번 나온 것으로 기억한다. 주인공 래리의 아내와 바람난 남자 싸이가 죽고 나서 장례식 장에서 "그는 정말 serious man이었습니다." 하고 나온 대사와, 참다 참다 못 견딘 래리가 "저는 serious man이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라고 한 대사. 공통점은 serious man이 긍정적인 의미로 쓰였지 부정적인 의미로는 쓰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표면적인 의미 말고 조금 다른 의미로 비꼰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해 봐도 글쎄, 그건 아니다. <시리어스 맨>의 serious man은 대체 무슨 뜻으로 쓰인 말일까.

2016년 1월 21일 목요일

<프랑스 영화처럼> 신연식 감독 옴니버스 영화

1월 7일 광화문 씨네큐브. <프랑스 영화처럼> 시사회.
정말 좋은 영화를 두 편이나 만난 날. 기분이 좋았다.


타임 투 리브

장편으로 만드는 것이 더 나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런 이야기에는 감정을 쌓아올릴만한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1박 2일의 촬영기간은 사흘 동안의 이야기를 담기 충분치 않다.
어머니와 네 딸들이 나눴을 좋은 이야기, 그들이 먹었을 좋은 음식들이 생략된 것이 무척 아쉽다.
장편으로 만들었더라면 어떤 영화가 되었을지 참 궁금하다.

또 네 딸들의 캐릭터가 다들 비슷비슷하고 분명치 못했다는 친구의 말에 동감!





맥주파는 아가씨

네 편의 단편 중 가장 아쉬웠던 영화.
술집에서 뭔가 해 보려는 남자들 얘기.
신연식 감독이 고등학교 때 쓴 연극 느낌의 각본이라고 한다.
하나의 작은 콩트.

자기 진심은 그렇게 알아달라면서 남의 진심을 모르냐는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
행동이 불편한 장애인이 나와 다솜을 이리저리 따라다니면서 귀찮게 구는데
안 착한 장애인 캐릭터를 등장시킨 것이 눈여겨볼 점.




리메이닝 타임

네 편의 단편 중 가장 마음에 들었다.
<타임 투 리브>가 장편이 더 나았을 영화라면
<리메이닝 타임>은 장편으로 반드시 찍어야 하는 영화이다.
100일의 시간밖에 함께할 수 없는 연인.

<리메이닝 타임>을 장편화한다고 생각해 보았을 때
이 연인의 자식의 관점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면 재밌을 것 같다.
아버지의 존재를 모르고 자라온 자식은 어머니로부터 '젊었을 적 점 본 얘기'를 듣게 되고
극적으로 아버지와 재회한 자식은 다시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를 이어 준다.
하지만 이들에게 허락된 시간은 진짜로 100일 뿐이었고
이들은 행복한 시간을 함께하다 죽는다.

좀 극단적인데.. 더 감미로운 이야기가 탄생할 수 있는 소재이다.
100일의 시간을 함께 보내면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
내가 감독이었다면 이 아이디어로 장편을 만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 스티븐연 배우의 한국말 연기가 너무 재미있었다.





프랑스 영화처럼

옴니버스를 엮은 표제 <프랑스 영화처럼>과 동명의 단편.
신연식 감독의 전작에 출연했던 이유미 배우가 성인의 모습으로 나와 반가웠다.
이 각본도 감독이 고등학교 시절 썼다고 한다.

흥미로운 점은 <맥주파는 아가씨>에 등장한 다솜이 여기에 전혀 다른 이미지의 인물로 출연한다는 점.
그렇지만 이 둘이 전혀 다른 인물이라고는 볼 수 없다는 점.
마침 다솜이 언급하는 '평범한 삶'이라는 단어가 이 둘을 엮어 주고 있다.
다른 그림이지만 그렇다고 붙여 볼 수 없는 것도 아닌 그림.
단편과 단편을 붙였을 때 새로운 의미가 탄생하는 재미. ex)<옥희의 영화>

<맥주파는 아가씨>를 보고선 '남자는 참...'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프랑스 영화처럼>까지 보고 나니 '여자는 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편을 모으면 그 중에서 몇 개 빵꾸가 있기 마련인데
아쉬운 작품은 있어도 다들 좋은 단편이었다.
생각해 보면 신연식 감독의 영화는 한 편 걸러 한 편 좋았던 것 같다.
<러시안 소설>과 마찬가지로 화면이 되게 예쁜 영화였다.
조명 때문인건지 보정을 잘 한건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부드럽고 예쁜 질감이었다.
다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ㅎㅎ

극장에서 신연식 감독을 보았지만 관객들 앞에 공식적으로 나오진 않았다.
한 번 인사라도 해 주지..






2016년 1월 20일 수요일

<유스> Simple Song #3

수영 하고 나서 영상자료원 가기 전에 시간이 비어서
졸릴까봐 맥도날드에서 커피를 사들고
아트나인에서 <유스>를 보았다.
뒤늦게 그게 개봉 첫 상영이란 걸 알았다.
정말 좋은 영화를 두 편이나 만났던 그 날. 정말 기분이 좋았다.




올해 개봉작을 아직 많이 보지 못 했지만, 2017년을 맞이하며 올해의 베스트를 꼽을 때면 <유스>가 가장 먼저 기억나지 않을까. 그 때 느낀 것들은 너무 많아 다 기억나지 않는다. Simple Song이 자꾸 입을 맴돌 뿐..

F 왜 하필 제목을 YOUTH로 지었는지는 모르겠다. 두 노인의 눈에 보이는 건 젊음뿐이기에 이 영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것들이 젊음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겠지만, 그런 젊음을 지켜보는 두 노인의 눈이 더 중요한 것 아닌가. 그렇다고 제목을 '늙음'으로 짓자니 칙칙하고..?

F 마이클 케인이 연기한 인물에 깊이 이입되어 영화를 보았다.




<유스>를 보며 느낀 좋음이 어떤 좋음이었는지 분석해 보고 싶어지면 <유스>를 다시 보게 될지 모른다. 아직은 <유스>를 보면서 느낀 감정을 그대로 내버려 두고 싶다.

<아마데우스> 나는 거창한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제부터 "명작 영화 별로 안 좋아해요.."라고 하지 말고 "거창한 영화 별로 안 좋아해요.."라고 말해야겠다. 내가 정말로 싫어했던 건 거창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명작들이 거창해서 나는 명작 영화를 안 좋아한다고 뭔가 꺼림칙한 느낌으로 말하고 있었다.

거창한 것이 왜 싫냐. 너무 존엄해 보여서 싫다. 영화가 나보다 훨씬 더 커 보이는 느낌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될 수 있는 한 난 내가 온전히 소화할 수 있는 영화를 좋아하려 한다. <아마데우스>는 내가 보기엔 너무 거창하다. 보다 보면 가벼운 장난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것조차도 거창한 분위기 속에서 움직인다. 할아버지가 애써서 농담하는 걸 짠하게 듣고 있는 내 심정이라고 해야 할까.

<노킹 온 헤븐스 도어> 제주도 가던 날

수능 끝나고 학교에서 본 여섯 번째 영화.




한 다섯 번 보았나. 학교에서 친구들끼리 제주도 여행가는 날에 이 영화를 보면 딱 좋을 것 같아서 골랐다. 하지만 나 혼자 볼 때와는 많이 다른 느낌이었다. 영화 별로 좋아하지 않는 친구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던 적이 있지만 나는 <노킹 온 헤븐스 도어>를 여러 사람들한테 추천해왔다. 이번에도 반응은 그리 좋지 않았던 것 같다. 그냥 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웬만해서는 나 혼자 즐기는 게 좋을 듯. 나도 이젠 <노킹 온 헤븐스 도어>를 보면 진짜 좋다기보단, 좋아한다는 이유 때문에 보는 느낌이다. 나중에 또 다시 보고 싶어지겠지만..

그렇게 바다를 보고 싶어하던 영화를 감상하고 나서 바다를 보러 여행가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다. 아무 느낌도 없었다.

<리얼 술래잡기> 미소녀란 없다


맥주 먹으면서.
<두더지>가 정말 좋았던 나는 소노 시온의 차기작을 보았다.






시나리오를 영화로 옮기면 확실히 느낌이 다르다. 영화를 보고 나서 시나리오를 상상해 보았다. 시나리오로 읽었을 땐, 좀 덜 혼란스러웠겠지?

영화는 계속해서 혼란스러운 이야기만 되풀이하다 끝에 가서야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미소녀만이 등장하는 잔혹한 서바이벌의 세계는 미래 세계의 게임 속 세상이었다. 그 곳에서 탈출한 미츠코가 보게 된 세계는, 남자들의 세계. 게임 캐릭터를 현실화해서 그녀들을 잠자리 상대로 하는 나쁜 아저씨들의 세계. 남자들이 원하는 대로 여자들이 대상화되는 이 짜여진 세계에서 미츠코를 비롯한 여자 주인공(그러나 남자 세계의 조연)들은 결국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 그리고 아무 것도 없는 순백의 도화지같은 눈밭에서 일어나 프레임 바깥으로 달려간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봤더라면 좀 더 나았으려나. 등장인물들이 아무 이유없이 휙휙 바뀌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적들이 등장하는 이상한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 많이 혼란스러웠다. 미소녀들의 몸통이 쑥 잘려나가는 그런 영화를 보러 온 관객들에게 이제 그만 정신 좀 차리라고.. 하는 이야기. 타겟층이 너무 확고한데 그 타겟층이 보면 별로 반가워하지 않을 이야기. <퍼니 게임>이 생각난다. 담고 있는 메시지를 떠나서 결정적인 차이는 그 영화가 사람들을 이끌 수 있는 호흡으로 진행되었느냐 아니냐인 것 같다.

<대호> CG의 문제


12월 16일. 팟캐스트를 함께 했던 친구들과 메가박스 센트럴 부띠끄관에서..




영화 후반부. 최민식과 애꾸눈 대호 사이의 과거 플래시백에 이어 최민식이 아들의 시체를 두고 오열한다. 감정을 이만큼 끌어올린 장면에다가 그대로 비슷한 장면을 붙여놓았다. 여러 모로 실망스런 영화지만 이 장면에서 <대호>의 각본가이자 연출자인 박훈정 감독에 대한 신뢰가 저만치 떨어졌다.

<대호>의 CG는 매우 실망스럽다. 아예 새로운 CG세계에 등장하는 새로운 크리처들과 다른 점이 뭔가 하면, 부자연스러움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동물과 가상의 동물의 움직임 중에서 우린 실존하는 동물의 움직임을 더 잘 안다. 그렇기에 실존하는 동물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더 쉽게 알아차린다. 내가 본 <대호>의 가장 큰 단점은 부자연스러운 CG 호랑이다. CG를 전문적으로 알지 못 하나, CG로 표현된 동물 특유의 '과한 부드러움'이 문제였다고 할 수 있겠다.

아무튼 나는 이 부자연스런 호랑이를 보며 '부자연스럽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고, 감정이입을 하기란 매우 힘들었다. 이런 호랑이의 '감동을 주는' 비하인드 스토리를 겨우겨우 보고 나니 그 다음엔 최민식이 울었다. 그냥 운 것도 아니고 아들의 시체 앞에서 울었다. 감정의 강도가 센 장면들을 연속 배치하는 건 피하는 게 좋았을 텐데. 이미 지겨울대로 지겨웠던 나는 거기서 그만 지쳐버렸다.

CG만 아쉬운 것이 아니었다. <고질라>같은 착한 괴수물을 별로 안 좋아한다.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죽음에서는 아무것도 안 느껴졌다. 정석원 캐릭터가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왜 그렇게 분노하는지 과거사가 알고 싶었다. 러닝타임이 짧은 편도 아니다. 지리산의 겨울을 이길 수 없다는 일본 고관의 말이 어쩜 그리 영화를 허무하게 만들었던지.


<악마를 보았다> 각본과 <부당거래> 각본, <신세계> 각본 연출의 박훈정 감독이 각본, 연출을 맡았으니 당연히 기대가 이만치 올라 있었다. 기대가 클수록 실망이 큰 법. 그러나 박훈정 감독의 영화라는 걸 차치하고서도 이 영화는 별로였다. 가장 큰 불만은 CG였다.

2016년 1월 11일 월요일

<스누피:더 피너츠 무비> 짧아서 아쉬운


12월 24일. 친구 두 명과 함께 롯데시네마 서울대입구. 끝나고선 라멘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2015년 내가 기대했던 작품들은 다 별로였다. 스누피 또한 2015년 기대작. 내 취향에 맞는 영화를 제대로 고르지 못 해 슬프다.

<스누피:더 피너츠 무비>는 아쉬운 점이 많은 영화였다. 극장판으로 끌고 가기엔 너무 이야기가 단촐하다. 오프닝으로 등장하는 블루스카이 사의 단편 애니메이션과 자잘한 쿠키영상들을 빼면 러닝타임도 짧다. 스누피가 레드 바론과 싸우는, 뻔하디 뻔하고 별 의미 없는 이야기까지 빼면 더더욱 짧다. 기대했던 것은 패배자의 정서였다. 항상 실패만 하는 아이 찰리 브라운이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기대하고 있었지만 너무 짧았다.

애들 보는 영화를 애들 있는 극장에서 보았다. 생각보다 괜찮은 경험이었다. 중간에 시끄럽게 굴거나 지루해서 자리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광경을 생각했지만 별 시덥잖은 개그에도 까르르 웃어대는 아이들 옆에 있다 보니 나도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계속 도전하는 게 어디야~"
극 초반 연을 날리다 실패하는 찰리 브라운에게 위로를 건네는 라이너스. 이 대사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찰리 브라운의 짝사랑, 빨간머리 소녀는 찰리 브라운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정직하고 남을 위할 줄 아는 인품을 볼 줄 아는 여자였던 것이다.
고백. 성공. 우와! 하고 끝이 나는 것이 심심해서 아쉬웠지만
찰리 브라운에게 네가 헛되게 살아온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 조금 뭉클했다.
큰 것은 바라지 않고, 모두가 착하게만 자라준다면 참 좋을텐데.

<나이트 크롤러> 반어적 연출

수능이 끝나고 학교에서 본 세 번째 영화.
무슨 영화를 보냐는 선생님의 말에 한 친구는 "기레기 영화요!" 하고 대답했다.

결말을 보고선 당황했다.
"권선징악같은 건 없는 거야? 응? 이렇게 끝나는 거야?"




<나이트 크롤러>를 본다면 순간순간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어, 이게 아닌데...' 주인공 루이스 블룸을 무감각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 무감각한 것과는 좀 다르다. 그는 목표가 뚜렷하며, 감정을 못 느끼는 것도 아니다(감정을 굳이 표현하려 들지 않을 뿐). 방향이 뒤틀려 있다. 지칠 줄 모르는 그의 진취적인 태도, 참 좋은데 그 방향이 잘못된 곳으로 향하고 있다. 문제는 그가 자신의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걸 느끼지 못 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흔히 반사회적 인격장애, 소시오패스라고 부른다.


소시오패스를 소시오패스적으로 연출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나이트 크롤러>는 그 형식과 내용이 일치하는 재밌는 사례이다. 영화 속의 인물이 그러한 것처럼, 영화의 형식 또한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 사건이 단단히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걸 느낄 때면 삽입되는 음악은 과하게 밝고 평온하다. 결말은 가히 충격적이다. 의도적으로 동료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루이스 블룸은 자신의 회사 '비디오 프로덕션 뉴스'의 규모를 더 키우고, 사원들에게 그럴싸한 말들을 하고선 밤거리의 도로로 흩어진다. 그 다음으로, 신나는 음악이 깔리며 크레딧이 올라간다. 루이스 블룸을 징벌하지 않고 끝이 난다는 것은 생각해 볼 여지를 남긴다.

<나이트 크롤러>의 반어적 연출이 대책 없이 끝나는 권선징악식의 이야기보다 훨씬 가치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권선징악은 딱 거기서 적을 물리치고 끝내지만, 현실은 안 그렇지 않은가. 관객이 찝찝하고 불쾌한 느낌을 받는다면 현실이 조금 나은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지 않을까?
- 그러나 한편으론 그런 식의 결말이 무의미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현실에선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영화에서 성사시켜 대리만족을 느끼게 해 주는 영화. 이를테면 <베테랑>이나 <내부자들>. '정의는 승리한다'는 식의 웃기지도 않는 농담이, 어떤 사람들에게 그런 현실을 바꾸고자 하는 노력으로 작용한다면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의미있지 않을까? 어느 것이 좋은 것인지..


<어린왕자> '어른'이 보기엔,

2015년 12월 29일. 2015년 마지막 영화. 메가박스 코엑스.
나는 책 [어린왕자]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




좀 더 어릴 적 읽었던 [어린왕자]라는 소설에 대한 어렴풋한 기억으로 글을 시작한다. 주인공은 창의적인 그림을 그릴 줄 알았던, '숫자'로 상징되는 어른들을 좋아하지 않았던 조종사. 다른 세상에서 온 것만 같은 어린왕자를 만나 그의 여행담을 듣는다. 초등학생 때 했던 독서논술을 통해 처음 접했던 것 같다. 선생님은 '나이가 들면 달리 보이는 책'이라고 했다. 대충 이것들이 내가 기억하는 책 [어린왕자].

애니메이션 <어린왕자>는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늙은 조종사의 옆집에 이사온 소녀의 시선으로 전개된다. 소녀가 살아온 세상은 딱딱하고 네모반듯한 규칙적인 삶이고, 늙은이가 들려주는 것은 종이 질감의 부들부들하고 따뜻한 이야기다. 후반부에 들어서선 '원작 파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지금까지 생각하던 [어린왕자]와는 많이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소녀는 위독해진 조종사를 대신해 직접 비행기를 몰고 어린왕자를 찾아간다. 어린왕자는 이미 몸도 마음도 어른이 되어 장미에게 돌아가려던 자신의 과거를 싹 잊고 살아가고 있었다. 소녀는 다 커버린 어린왕자의 마음 속에 남아있던 동심을 일깨워 그를 그가 돌아가려던 소행성으로 데려다 준 뒤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감성'이고 뭐고 없고, 원작의 깊이도 이렇게 얄팍한 수준이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애니메이션 <어린왕자>는 매우 극단적이다. 아이를 마음 속에 품고 자라는 것과 완전한 어른이 되는 것 사이에서 판단의 여지를 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자신이 아이였을 때를 기억하라 강요한다. 영화 속의 어른 세상은 죄다 딱딱하고 우울하고 칙칙하다. 또 영화 속 어른들은 죄다 속내가 뒤틀려 있고 하는 말은 다 우스꽝스러운 말들 뿐이다. 영화는 무조건 어른처럼 사는 것은 옳지 못하고 아이처럼 사는 것이 좋은 것이라며 이분법적으로 세상을 잘라낸다. 이로 인해 이 영화에서 지칭하는 '어른'들이 '어른' 세계가 부정당하는 것을 자기 세계에 대한 공격으로 느끼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게 된다. 매우 유치한 비교를 이 영화가 했다. 굉장히 설득력 없다.

'악당'들을 너무 이상하게 만들어놓기도 했거니와, 그 반대편도 이상하다. 장미와 여우가 어떤 캐릭터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원작을 자세하게 기억하진 못 하지만, 장미가 말하는 '욕심'과 여우가 말하는 '우정'의 의미가 이 영화에서 얼렁뚱땅 그려진 것은 확실하다. 그럴듯한 뜬구름 잡는 대사들밖엔 없다. 원작도 이런 내용이었나? [어린왕자]가 희생당했다는 생각이 든다. 왜 하필 영화가 말하는 동심의 상징이 [어린왕자]여야만 했는가?


2016년 1월 10일 일요일

<암살> 스포일러를 들어도 재밌는 이유

1월 9일 저녁 시네마테크 KOFA
최동훈 감독, 오동진 평론가 GV
2016년에 본 영화로는 처음으로 쓰는 글.






분명 스포일러를 들은 영화이건만 재밌었다. 지금까지 본 최동훈 감독의 영화는 <도둑들>, <암살> 두 편. 최동훈 감독은 처음부터 누가 밀정인지를 까버렸고, 쌍둥이 캐릭터의 존재를 관객들이 일찍 스스로 알아차리게끔 만들었다. 외부와 내통하는 스파이, 같은 배우가 연기하는 쌍둥이 캐릭터. 손쉽게 서스펜스를 연출할 수 있는 아주 매력적인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은 <암살>의 반전요소로 작용하지 않는다.




<도둑들>을 본지가 꽤 되어서 틀린 기억일지 모르나.. '한 방'을 먹이는 영화가 아니었다. 준비 준비 준비 땅! 하는 식이 아니라 준비 땅 준비 땅! 하는 식. 등장인물들이 작전 수행하는 타이밍이 2시간짜리 영화치고 좀 이르다 싶을 때, 첫 게임은 생각보다 일찍 끝나고 그 다음 본 게임을 준비한다.
<암살>도 그랬다. 모든 인물이 모이지 않은 상태로 시작된 첫 작전. 풀리지 않은 떡밥도 여러 개. 보란듯이 첫 게임은 실패하고 다음 게임이 시작된다.

반전에 매달리지 않고, 딱 한 순간으로만 끝나지 않는 것이 내가 본 최동훈 영화 두 편의 미덕이었다. 스포일러를 들으면 재미가 싹 사라지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 <암살>에는 '결정적 스포일러'가 없다. 결정적 스포일러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은 것이 의도적인 작법이라면, 꼭 배우고 싶다. 스포일러를 들어도 재미가 있다는 건, 그냥 그 자체로 '재미가 있는' 영화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좋은 캐릭터들이 만들어가는 좋은 상황. 대사.. 대사의 맛은 기대보단 아쉬웠다. 아무래도 떠벌떠벌 하는 가벼운 분위기의 영화가 아니라서 그랬던 것 같다.

<도둑들>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씹던껌(김해숙)이 죽을 때. 차내에 카메라를 달아 촬영하는 차사고 장면을 좋아하기도 하고, "아니에요, 내가 꿈을 잘못 샀어요.."라는 대사도 참 좋았고..
<암살>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영감(오달수)의 작별. "3천불, 우리 잊으면 안 돼~" 하는 장면이 플래시백으로 한 번 더 등장하는 것이, 느낌이 묘하다. 해방 직후 김원봉이 무수한 작전 과정에서 목숨을 잃어간 이들을 기리는 의식 비슷한 것을 치르며 김구에게 했던 "이 사람들도 다 잊혀지겠죠?"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우리가 직접 제시해 주길 바라는 것 같은..

<암살>에 대한 안 좋은 평을 많이 들어서 기대치가 낮았는데 매우 만족스러운 영화였다. 최동훈 감독의 영화들을 하나둘 살펴봐야 할 것 같다. 최동훈 감독의 말에선 느낄 점들이 많았다. 오락영화 찍는 감독이라고 내심 만만하게 봤던 것이 사실이다. 이제는 그런 색안경은 싹 벗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