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4일 일요일
김영하 장편소설 [너의 목소리가 들려]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저 구름 위로 올라간 마술사가 어디로 갔을지 궁금했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의 조수를, 마술사가 사라진 뒤 내시의 피로 흥건했을 현장에 홀로 남겨졌을 소년은 어떻게 됐을까를 생각한다. 9p 프롤로그
그녀는 아기를 들어올렸다. 바로 그 순간, 울음이 터졌다. 맨홀 뚜껑을 밀어올리고 치솟아오르는 장마철의 하수처럼, 울음은 그녀가 앉아 있는 부스 안에서 소용돌이치다가 화장실 전체를 채우더니 그대로 흘러넘쳐 소란한 터미널로 나아가 사람들을 덮였다. 16p
내가 제이를 데리고 내려오기 위해 서둘러 지그재그로 주류상자들을 딛고 올라가는 사이 제이는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두 팔을 양쪽으로 벌리고 몸의 중심을 낮추는 것이 마치 권력자의 강압에 못 이겨 마음에도 없는 춤을 시작하려는 어린 댄서 같았다. 31p
내가 원하는 것을 제이가 알아차려준다는 것의 달콤함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환상을 깨고 싶지 않았다. 그래, 그거. 나는 고개를 끄덕여 제이가 원하는 것을 그냥 내가 원했던 것인 양 믿어버리곤 했다.
제이는 내 욕망의 수신자가 아니라 통역자였다. 34p
"그렇다면 고통의 경중은 누가 가리지? 네가 가리나? 우리에 갇혀 있는 개들만 고통받는 줄 알아? 개장수들도 먹고사느라 힘들다고. 그 사람들에게도 가족이 있어. 네가 타이어를 펑크냈기 때문에 그 집의 아이들이 하루를 굶어야 할지도 모르잖아?"
"그렇게 따지기 시작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잖아요?" 73p
83~84p
(대학로의 비보이 리더가 제이에게 경고하는 대사)
"하여간 지도 빈대면서 말 졸라 많네. 좀 셔럽하세요, 이 씨발아." 92p
화장실 밖으로 나온 제이는 사과를 깎고 놓아둔 과도를 한참이나 노려보았다. 뭔가 위험한 기운을 감지한 큐빅이 옆으로 다가와 말없이 제이의 팔을 잡았다. 101p
함구증의 시절에 제이는 내 욕망의 통역자였다. 이제 그는 내 고통을 읽으려 하고 있었다. 나는 쉽게 읽고 던져버릴 수 있는 대중소설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131p
"신은 원래 그런 존재야. 신은 비대칭의 사디스트야. 성욕은 무한히 주고 해결은 어렵도록 만들었지. 죽음을 주고 그걸 피해갈 방법은 주지 않았지. 왜 태어났는지는 알려주지 않은 채 그냥 살아가게 만들었고." 134p
제이는 두 번이나 버려졌고 험난한 몇 년을 보냈다. 독서량이나 생각의 깊이에서 나를 압도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내 인생에 대해 툭툭 던지는 조언 혹은 해결책은 내가 겪고 있던 존재의 위기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 같았다. 제이에게 그런 일들쯤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부모가 이혼을 하고, 혼자 살던 아버지가 아이 둘 딸린 여자와 재혼을 하고, 그렇게 들어온 새엄마가 나를 끔찍하게 불신한다는 정도의 일은 TV만 틀면 나오는 진부한 이야기에 불과했다.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은 제이에게는 너무나 간단한 일이었다. 147p
제이에게 가 닿는 내 모든 절실한 문제는 흔해 빠진 재혼가정에서 벌어지는 별반 대수로울 것도 없는 이야기로 전락해버렸다.147~148p
권력은 폭력이 본래 구현하려던 것을 폭력 없이 구현하는 힘이라는 것을 금세 알아차렸다. 161p
"폭주는 우리가 화가 나 있다는 걸 알리는 거야. 어떻게? 졸라 폭력적으로. 말로 하면 안 되냐고? 안 돼 왜? 우리는 말을 못 하니까. 말은 어른들 거니까. 하면 자기들이 이기는 거니까 자꾸 우리보고 대화를 하자고 하는 거야." 163p
"거기서 누구 하나를 때리면 어른이 나타나서 물어. 왜 그랬냐고. 나는 그게 대화이고 관심인 줄 알았어.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그냥 묻기만 해. 그러고는 벌을 줘. 하지만 적어도 혼자 삭일 필요는 없는 거지. 어차피 세상은 우리에게 벌을 줘." 163p
그러나 집으로 돌아와서는 다치고 멍들었을 그가 안쓰러워 조금 울었다. 184p
너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다, 라는 말로 단호하게 규정되었고, 그러자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그 말에서 헤어날 수 없게 되어버렸다. 184p
이번에 읽은 김영하의 장편소설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꽤 실망스러웠다.
폭주족 에피소드가 시작하면서 소설은 겉잡을 수 없이 지루해졌다.
10대들이 오토바이 타고 폭주하고 다니는 것은 너무 옛날 얘기 아니면 지금도 음지에서 일어나지만 내가 모르는 얘기일 것이다.
폭주족의 심리를 풀어쓴 대목은 어느정도 공감이 가지만 전혀 흥미롭지 않았다.
재미도 없고 멋지지도 않은 이 부분은 이야기의 상당부분을 차지한다.
그 누구라도 화자인 동규가 주목하는 제이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이 부분쯤 되어서 그는 동규 그리고 승태로부터 너무 멀리 떠나온 존재가 되어버린다.
이야기는 뜬금없이 등장한 인물 박승태를 중심으로 힘없이 맥없이 8.15 전야의 폭주를 루즈하게 풀어놓는다.
이야기는 꽤 일찍 끝이 나고 우리는 꽤 이른 에필로그를 맞닥뜨리게 된다. 에필로그에 따르면 이 소설은 실화에 기반했다고 한다. 에필로그 또한 작가의 픽션이 아닌가 싶었지만 일단 그렇게 믿어달라니 믿어 본다. 하지만 제이의 승천만은 너무 과장되지 않았나 싶다. 나보고 그걸 믿으라고?
제이가 겪는 일들을 마주하며 나는 소외감을 느꼈다. 그가 겪은 세계는 너무 올드한 터치로 그려져 있었다. 그리 오래지 않은 시간 전에 아이였던 내가 감히 아이들에 대해 말하건대, 아이들의 말은 이 소설의 대사(대표적으로 83~84쪽에 걸친 대학로 비보이 리더의 말)처럼 길거나 심각하지 않다. 대사의 주인이 아이라고 하기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고 너무 많은 생각을 하고 있다.
화자인 동규의 묘사 또한 그 깊이가 너무 깊다. 서술에서 나는 동규가 아닌 40대 후반의 작가 김영하를 떠올렸다.
폭주족 에피소드를 읽다가 소설 읽기를 그만 둘까 싶었지만 꾸역꾸역 다 읽어냈다. 에필로그가 마음에 걸린다. 진짜로,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 몇 사람들의 입을 거치고 작가 김영하를 통한 결과물일까? 제이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런 사람이 실제로 있기나 했을까? 어떻게 생겼을까?
놀랍게도 이 소설에서 나는 딱히 느끼는 것이 없었다. 무엇을 표현하려 했을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괜히 이 책을 택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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