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6일 화요일

<현기증>(1958) 옛 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을 사랑하다



스릴러의 대가 히치콕의 영화에서 사랑이 중요했던 경우는 드물다.
<현기증>을 다시 보던 나는 후반부를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스카티는 길에서 자신이 사랑한 매들린과 똑 닮은 여자를 보고 그녀의 뒤를 밟아 그녀가 사는 호텔로 찾아간다.
여자는 그런 사람 모른다며, 자기 이름은 주디 바튼이라고 하지만 실은 정체를 숨긴 채 살아가던 매들린이 맞았다.
그녀도 여전히 스카티를 사랑하고 있었고 둘은 교제를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죽은 매들린을 향한 스카티의 집착은 주디의 옷과 헤어스타일 그리고 화장에 대한 강요로 이어진다.
마침내 그녀가 매들린의 옷과 얼굴을 하고 나타나자 스카티는 진심으로 행복을 느낀다.


스카티의 매들린을 향한 사랑이 주디에게로 이어지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아무리 다른 옷을 입고 다른 머리를 하고 다른 화장을 해도 길에서 마주친 그 순간 스카티는 주디에게서 매들린을 느꼈다.
스카티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주디를 과거 자신이 사랑했던 매들린처럼 바꾸려 한다.
범죄행각을 들키지 않기 위해 매들린의 껍데기로만 남아야 하는 주디는 스카티에게 매들린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 그 이상의 존재가 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스카티는 주디라는 한 사람의 신체를 사랑한 걸까?
틀린 말은 아니지만 스카티가 매들린 혹은 주디의 몸만을 사랑한 것이라 보긴 어렵다.
스카티는 매들린 그 자체를 떠올리게 하는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것을 원했기 때문에 주디에게 눈에 보이는 변화를 가했던 것이다.

정체가 들통난 주디는 매들린이 죽었던 종탑에서 발을 헛디뎌서 떨어져 죽는다.
만약 주디가 죽지 않았더라면 비밀을 알게 된 스카티는 현기증과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았을까?
또 매들린에 대한 집착에서도 벗어나 주디와 함께 잘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죄를 저지른 주디에게 어떻게든 벌이 내려지는 권선징악형 비극은 스카티를 더 비참하게 만들어버렸다.
여운을 느낄 새도 없이 바로 영화는 끝나버린다.
히치콕의 악취미가 드러나는 결말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스카티 앞에서 이러지도 못 하고 저러지도 못 하는 주디의 심정에 이입해서 후반부를 보았다.
정말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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