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1월 22일 화요일

<선샤인> 미치도록 아름답다는 것



아름다움이 주제이고 아름다움이 플롯이 된 영화.
그 시각적인 아름다움으로 모든 것이 납득이 가는 것도 정말 신기하다.
아름다움으로 인해 미쳐버릴 지경에 달했을 때에는 사운드도 큰 몫을 한다.
언젠가 극장에서 큰 화면으로 빵빵한 사운드로 다시 한 번 보고 싶다.

<광란의 사랑> 린치의 단점



데이빗 린치의 파격적인 멜로영화다.
내용을 들어보면 평범한 범죄멜로물을 떠올리겠지만 역시나 린치만의 연출스타일이 녹아있다.
그런데 이 영화의 스토리와 연출은 계속해 불협화음을 빚어낸다.
갱의 음모에 얽혀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도망치는 세일러의 이야기는 다른 감독이 연출했어야 옳다.
이건 린치가 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알멩이가 있어야 할 이야기인데 쫓고 쫓기는 그 과정이 너무나도 단순해서 재미가 없었다.
린치는 복잡한 서사는 못 만들어낸다.
플롯을 넣을 시간에 서사와는 무의미해 보이는 이미지들을 채워넣기 바쁘다.
결말부에서 빈약한 서사에 어떻게든 오즈의 마법사 모티브를 끼워넣어 초월적인 존재에 의탁해 갈등을 해결하려는 시도는 유치해서 차마 보기 민망할 정도였다.

타오르는 불꽃처럼 오프닝부터 급전개가 시작되지만 이 스피디한 전개는 바로 축 늘어진다.
하나도 재미 없었다.
린치 스타일은 다른 영화에서 다시 보기로.

<기쁜 우리 젊은 날> 여자친구와의 재감상



작년에 보고 정말 좋았던 영화.
순정남의 승리!
내가 제일 좋아하는 한국 멜로영화였다.
이번에 영자원에서 상영하길래 여자친구 데리고 가서 같이 보았다.
그런데 영화가 너무 순박하다 못해 단순하기까지 했다.
며칠 전에 본 <노트북>과 비교하면 너무 재미가 없었다.

지난번 감상 때는 엄청 깊은 영화같았는데 이번에는 그냥 휘리릭 하고 끝이 나 버렸다.
여자친구는 몸도 안 좋아서 계속 졸았다.
멀리까지 데려간 게 미안했다.
내가 이렇게 자신있게 남에게 영화 추천한 게 오랜만인데..
그렇게 이 영화는 내가 좋아하는 영화 대열에서 당분간 빠지게 된다..

(업로드한 사진의 맥주 마시는 장면이 느낌이 아주 좋다.)

2016년 11월 21일 월요일

<노트북> 계급에 대한 판타지, 사랑에 대한 판타지




이 영화를 보고 두 가지 단어를 잊지 않으려 했다.
계급, 시간.

계급.
이 영화에는 가난에 대한 엷은 판타지가 깔려 있다.
부유한 앨리의 가족들은 편가르기를 좋아하고 진짜 사랑을 무시하려 든다.
앨리의 약혼자 론은 어느 것 하나 부족하지 않은 매력남이지만 최종적으로 앨리의 선택을 받진 못 한다.
반대로 가난한 노아는 앨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더 잘 알고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진심을 담는 로맨티스트다.
놀랍게도 가난과 부유의 이러한 대비에 어긋나는 인물은 아무도 등장하지 않는다.

재밌는 점은 이 영화가 신분상승의 판타지보다는 신분하강의 판타지 쪽에 가깝다는 점이다.
신분하강의 판타지? 얼핏 들어선 말도 안 되는 말이다.
신분이 낮아지는 걸 어떻게 판타지로 생각하겠어?
하지만 영화상에서 부유한 노아와 가난한 앨리가 결혼한다고 해서 영화를 보는 내가 돈을 잃는 식으로 손해를 입는 건 하나도 없다.
신분하강까지 감수한 선택을 우리는 오히려 아릅답게 받아들였다.
우리는 진짜 사랑이라면 그 누구도 품어줄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에 잠시 빠져들어 이 영화 속 사랑을 그 무엇보다 순수한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신분상승 스토리보다 덜 속물적이기까지 하다.
이 영화가 신분상승 스토리로 부르지 않고 신분하강 스토리라 부르는 이유는, 노아와 론 중에서 누굴 자기 남편으로 삼을지 앨리와 우리가 함께 고민했기 때문이다.

우리 삶은 어떤가, 부유한 상대를 버리고 가난한 사람과 평생을 함께 할 자신이 있나?
가난한 자들보다 부유한 쪽이 더 매력적으로 그려지는 그림은 너무 현실적이라 아름다운 로맨스로는 부적격이다.


시간.
이 영화의 시간은 독특하다.
제목으로도 쓰인 '노트북'을 통해 영화는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화법을 구사하고, 거기에 더해진 치매라는 장치는 마치 치매에 걸린 환자가 잊고 있었던 사실을 알아내듯 이 영화에 숨겨진 가벼운 반전을 관객들 스스로 유추하게끔 한다.
눈여겨볼 점은 '사랑'이라는 주제를 택한 이 영화가 골라낸 사랑의 모습이 어느 사랑의 시작하는 순간과 끝나는 순간뿐이라는 점이다.
젊은 배우가 연기하는 시간과 노년 배우가 연기하는 시간 사이의 공백은 굳이 보여 줄 필요가 없다고 이 영화는 판단했다.
론이나 가족들과의 관계 해결도 없이, 어렵기만 한 육아도 없이 말끔하게 늙어버린 이 두 연인은 결국 한 쪽이 치매에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서로와 함께 있음을 인지한 채로 동시에 세상을 떠버렸다.
앨리가 내린 결정에는 한 치의 문제도 없었고 이들의 결혼생활은 끝날 때까지도 너무 아름답다.

이 로맨스 영화에는 진실이 담겨있지 않고 이 로맨스 영화로는 세상을 똑바로 볼 수가 없다.
따라서 이 영화를 볼 때 그 순간만큼은 행복했는지 몰라도 이 영화를 나중에 돌아본다면 그저 행복하기만 한 영화로 기억될 것이다.
인생을 아름답게만 포장하는 영화는 진통제 같아서, 그 아픔을 덮을 수는 있어도 결코 치유할 수는 없다.

< 4등> 때려서라도 잘 한다면


1. 1등에 집착하던 어머니 없이 혼자서 하니 1등이 되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의아한 점이 있다. 준호가 행복해할 때는 레인을 넘나들며 물 속으로 들어오는 빛을 만끽하며 헤엄칠 때이지, 남들보다 더 빨리 결승점에 골인할 때가 아니었다. 그래서 결과에 대한 집착 없이 하고 싶은 걸 했을 때 비로소 1등을 했다는 이야기는 믿을 수가 없다.

2. 누군가는 그렇게 준호가 1등을 했다는 사실에 감격할 것이고, 누군가는 그렇게 1등을 하고 나서도 마냥 기뻐하지 않는 준호의 얼굴에 생각이 많아질 것이다.

3. 과거 시퀀스가 필요 이상으로 긴 감이 있다. 광수와 준호 아버지의 관계가 후반부에서 그리 중요하게 쓰이지 않는다는 것도 아쉽다.

4. 영화의 어머니만큼은 아니지만 내 아이가 1등하면 좋겠고, 내 아이가 좋은 대학 들어갔으면 좋겠다. 나는 억압받고 맞으면서 컸다. 그래서 대학을 잘 간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잘 컸는지는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대학을 가면 좋은 것이 많다. 억지로라도 공부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아이에게 어떻게 설득해야 할까? 억압받지 않으면서도 한 명의 사람으로 잘 커가는 방법은 없을까? 세상을 조금 더 안다고 생각하는 어른으로서 아이에게 물려줄 것은 무엇인가? 혹시라도 나중에 자기를 자유롭게 키운 나를 원망하진 않을까?

5. 주제는 생각해봄직한 주제이지만 이 영화는 재미가 없고 미학적으로 우수하지도 않다.

2016년 11월 19일 토요일

<비포 미드나잇> 평범함을 평범하게 말하는



큰 기대를 했지만 평범하게 끝났다. 중년 부부가 싸우고, 달콤한 말로 위로하고. 특별하지 않은 인생의 단면. 딱 하나 특별한 점이라곤 이 인물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시리즈물의 주인공들이라는 점. "이 영화처럼 평범한 게 인생이다"라고 말은 할 수 있겠지만 긴 세월을 지나 완성된 세 번째 영화가 이렇게 평범하다는 게 많이 아쉽다. 딱히 대안이 떠오르진 않지만 평범함을 평범하게 전달하는 건 좋지 않다. 이렇게 할 거면 아예 다른 주제를 선택하는 게 낫다. 실제로 우리 삶에 그리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건 영화 없이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핑크 플로이드의 더 월> 음반과 영화의 크로스오버


장면 장면 떼어놓고 보면 그럴싸하지만 한 편의 영화로 모아놓았을 때는 연결이 되지 않고 따로 노는 작품이다. 각 곡마다 한 편의 뮤직비디오로 분할하지 않고 연속으로 보는 영화로 만들어야 했을 이유가 불충분하다. 핑크 플로이드의 팬이 아닌 내겐 이해하기도 힘든 지루한 영화였다.

잘못된 사회, 저항정신 그리고 새로운 시작..


2016년 11월 18일 금요일

<용서받지 못한 자> 이병 허지훈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동아리에서 내 발제 영화를 선정할 때 하나의 기준이 있다. 사람들과 할 이야깃거리가 있는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를 선정하면서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 허지훈같은 사람을 만났을 때 우린 어떻게 해야 하는가? 돌아온 선배들의 답은 생각보다 냉정했다. 허지훈이를 끝까지 책임질 능력이 안 되면 애초부터 신경을 안 쓰고 사는 게 맞다. 누군가는 이승영을 가장 나쁜 인물이라 말하기도 했다.
정말 슬픈 답변이지만 이것이 바로 세상을 편하게 살다 가는 법인 것 같다. 예전의 나는 누군가를 도우려 한 적이 있었다. 몇 번의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고 나는 그 친구를 싫어하게 되었다. 감정적으로 많이 힘이 들었다. 지금의 나는 이제 그런 노력을 굳이 하려 들지 않는다. 가끔씩 누군가에게 동정심이 생기면 또 힘들고 그런다.

<모노노케 히메>의 자연관에 대한 비판


사람들은 종종 인간과 자연을 나누는 오류를 범한다. 나는 인간 또한 자연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이 지구상에 일어나는 일 중에서 자연현상이 아니라고 부를 수 있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인간들이 총을 만들어 짐승들을 공격하는 것도 자연현상이고, 나무를 마구 베어내 산림을 파괴하는 것도 자연현상이다.
<모노노케 히메>의 자연관은 인간중심적이다. 자연에 신성성과 인격을 부여하려 하기 때문이다. 자연을 인간 위로 떠받드는 것이 인간이지만 결코 자연은 인간 위에 서려 한 적이 없으다. 또한 인간을 죽이는 자연재해는 인간을 향한 자연의 분노가 아닌, 물질과 물질간의 운동일 뿐이다. 이런 판타지보다는 그냥 다음 세대에게 지속가능한 자연을 물려주자는 말이 더 설득력있게 들린다.

<한여름의 판타지아> 연기라기보다 진짜.



1. 독특한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영화다. 그 과정이 이 영화를 더 매력적으로 만들었지만, 꼭 이렇게 만들어졌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1부는 왜 이리 긴가? 흑백은 왜? 불꽃놀이의 역할은? 인터뷰는 왜 이렇게 많이? 하지만 영화에 정답이란 없으니 이 영화만의 스타일을 존중하기로.

2. 자연스러운 연기가 너무 좋았다. 과장 좀 보태서 말해 지금까지 본 한국영화 연기 중 가장 현실에 가깝다. 2부의 거의 마지막 부분. 작별인사 하는 그 장면의 긴장감은 정말 최고였다. 자기 팔에 연락처를 적어주는 그녀를 지긋이 보는 그. 안타까움 섞인 키스.

3. 2시간짜리 영화에 담긴 짧은 사랑은 매력적이다. 기나긴 사랑을 압축할 필요 없이 짧은 시간 동안 벌어지는 사랑을 흥미진진하게 담는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사소한 차이가 결정하는 관계의 흐름



드디어 홍상수의 신작을 극장에서 볼 준비를 마쳤다.
이렇게 홍상수 영화 모두 순서대로 보기를 완료했다.

<그때는맞고지금은틀리다>라는 제목의 영화와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라는 제목의 영화로 구성되어 있다.
제목은 많이 이상하고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가 <그때는틀리고지금은맞다>가 아닌 이유는? 어감 때문인가? 지금이 맞다는 진술과 그때가 틀리다는 진술이 놓이는 순서가 중요했나?
두 편의 영화 제목 모두 '맞다'가 먼저 나오고 '틀리다'가 나중에 나온다. 왜 맞는 것이 우선이고 틀린 것이 나중인가?
띄어쓰기가 없는 이유는? 제목이 너무 길어서?
당연히 과거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때'는 과거를 가리키나 미래를 가리키나?

홍상수 영화 제목은 항상 어감이 이상하다.
평소에 안 쓰는 말도 아닌데 무척이나 생경하게 느껴진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는 말.
틀린 것들로 가득한 순간 속에서 유일하게 맞다고 할 수 있는 바로 지금의 이야기?

1부에서 2부를 바라보면 그때(2부)는 맞고(여자와 이어지고) 지금(1부)은 틀리다(여자와 안 이어진다).
2부에서 1부를 바라보면 지금(2부)은 맞고(여자와 이어지고) 그때(1부)는 틀리다(여자와 안 이어진다).
1부는 2부를 바라보고 2부는 1부를 바라본다.
1부는 왜 먼저 나오고 2부는 왜 나중에 나왔을까?
왜 영화는 실패한 뒤에 성공했는가?
그건 앞서 말한 맞고 틀림의 순서에 위배된다.
맞음이 외간여자와 실패하는 것이고 틀림이 외간여자와 성공하는 것인가?
-영화 분위기로 봤을 때 절대 성립할 수 없다. 2부가 더 긍정적으로 그려진다.

1부에서 남자는 여자와 잘 되려다가 실패한다. 그때는 맞았고 지금은 틀리다.
2부에서 남자는 여자와 잘 안 되려다가 잘 된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홍상수 감독의 연출 스타일은 즉흥적이다.
그래서인지 언젠가부터 나는 그의 영화에 대한 의문들을 별 의도가 없는 것이겠거니 하고 넘어가고 있다..
이번에 제목에 대해서 좀 더 많이 생각해 보았다.
결론은 나지 않고..



이 영화의 끝부분에서 나는 좋은 기운을 얻어갔다.
사소한 차이에서 비롯되었을 좋은 방향으로의 혹은 안 좋은 방향으로의 관계의 움직임.
1부와 2부 두 세계의 정재영은 다른 세계의 정재영을 상상하지 않는 듯하다.
작은 말 작은 행동으로 잘 풀렸을 혹은 잘 안 풀렸을 관계와 일들.
1부에서 2부로의 리플레이.


2016년 11월 16일 수요일

<빅 피쉬>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모르겠다. 일대기 영화


11월 4일 과내 밤샘영화제 첫번째 상영작 <빅 피쉬>
본 적이 있는 영화라 잠깐 앉아있다가 나가려고 했으나
타이밍을 놓쳐서 계속 보는데 꽤 재미있었다.

재밌다. <포레스트 검프>가 생각나는 한 인물의 일대기를 다루는 이야기다.
비슷한 영화로 <향수>도 생각이 난다.
언젠가는 꼭 한 인물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담는 일대기적인 이야기를 다뤄보고 싶은데 한국이라는 작은 땅을 배경으로 어떤 큰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는 더 생각해보아야겠다.


이 영화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는 모르겠다.
다 허풍인 줄 알았던 아버지의 이야기는 일정 부분 사실이었다.
아버지를 무시하던 아들은 아버지 자신의 이야기 속 세계를 인정하게 된다.
중요한 포인트 : 아버지의 이야기가 100% 거짓도 아니지만 100% 진실인 것도 아니다.

과거 리뷰
예전에 글을 적을 때도 나는 별로 할 말이 없었나 보다.
이야기가 정말 많다. 그게 재미 없는 건 아니다.
아름답고 감동적인 것. 그게 전부다.
팀버튼의 영화에서 나는 이미지 이상의 무언가를 보기 힘들다.

2016년 11월 15일 화요일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맥머피의 죽음


이 영화가 단순하게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 놀라웠다. 이대로만 나가면 될텐데. 파티를 벌인 뒤 창문 앞에 앉아 생각을 하던 맥머피는 다음날 빠져나가지 않은 채로 발견된다. 그는 왜 나가려고 하지 않았을까? 자기 동료를 내버려두고 나올 수 없기 때문에? 시스템에 혼란을 주는 것을 즐겨서? 시스템 안에 갇힌 병자들과 닮아가서? 두번째 고문을 당해 정신이 나간 맥머피는 무기력에서 벗어난 추장에 의해 질식사한다. 인디언을 연상시키는 전통음악이 흘러나오며 추장은 강한 힘으로 개수대를 던져 창문을 뚫고 나와 자유롭게 뛰어간다.

나는 이 영화의 결말을 미국인에게 박해당하던 인디언의 해방으로 읽고 싶지만 아는 게 별로 없어서 못 하겠다. 그런데 맥머피가 죽는 순간이 좀 의아했다. 혹자는 추장이 맥머피를 죽임으로써 그를 못 쓰게 된 육신에서 해방시켜줬다고 표현하는데 내가 봤을 때 본능은 붙어있었는지 베개에 숨이 막혀 바둥거리는 그의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추장이 맥머피를 굳이 죽이고 떠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반대로 생각해 보았다. 맥머피를 죽이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 맥머피는 죽어야만 했다. 그 이유는 바로 숭고함이다. 맥머피는 병원 내의 강압적인 질서를 뒤흔들고 사람들 마음에 자유를 선물해 주고는 영웅처럼 떠나간 것이다. 그의 죽음이 영웅적 서사 완성의 마침표를 찍었다.
추장은 정신이 나가버린 맥머피를 보고 바로 자기 안의 힘을 잃어버린 때를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혈기왕성한 누군가가 자신의 나약한 모습처럼 변해가는 것은 죽음보다 더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더 랍스터> 극단적인 전제 with 글을 쓰려는 세 번의 시도


모든 것이 각본가에 의해 짜여 돌아가는 빈틈이 없는 영화에는 매력이 없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재미가 없다.
인간미가 없다.
중간에 무의미한 걸 꼭 넣어줘야 한다는 게 아니라
애초에 불가능한 전제를 알면서도 제시했다는 것은 그렇게 해서까지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뭔가가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그 뭔가를 이야기하려는 작가의 말은 그다지 들어주고 싶지 않다.
거만하다. (이것이 나만의 상상일지도)

<더 랍스터>는 못 만든 영화는 아니다. 그런데 절대로 좋아할 수가 없겠다.
머리로만 만든 영화다.
굳이 영화로 볼 필요가 없었다.
딱히 날카롭다고 하고 싶지도 않고 사랑에 대한 비관이 나는 애처롭게 보인다.

하지만 서사극을 싫어하는 건 아니다.
비슷하게 작가가 관객 머리 위에서 놀려는 영화로 <퍼니 게임>이 있는데 나는 이 영화를 정말 좋아한다.
그런데 <더 랍스터>에 비해서 그 영화는 좀 기발하고 충격적이었다.
생각해 보니 두 영화를 제대로 비교해볼 필요도 없이 나는 <더 랍스터>의 그 말도 안 되는데 볼거리도 안 되는 그 설정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극단적인 전제가 마음에 들지 않아 <더 랍스터>를 볼 생각이 없었다. 이 영화의 비현실적인 설정들은 모두 작가가 하고 싶은 말에 의한 것이며, 작가의 생각에 어긋나는 게 나온다는 건 상상할 수가 없다.



1. <송곳니>를 만든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영화다. 원래같았으면 절대 안 볼 영화였지만, <더 랍스터>에 대한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어서 보게 되었다. 두 영화 모두 극단적인 전제를 바탕으로 한 우화, 절제된 화면과 연기가 특징이다. 그의 영화를 보지 않으려던 이유는 재수가 없어서였다. 얼마 전에 플라톤의 책을 읽다 만 것도 비슷한 이유이다. 두 개의 자아가 아닌 작가 한 명의 자아가 짜고 치는 문답법처럼,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극단적인 화법은 예상 밖의 무언가에 대한 기대를 할 수 없게 만든다.
며칠간 호텔에서 머무르다 짝을 찾지 못 하면 동물이 되고.. 그 반대편에는 솔로로만 살아야 하는 사회가 있고.. 이러한 비현실적이고 답답한 밑그림들은

2016년 11월 11일 금요일

<도그빌> 라스 폰 트리에.



1. <도그빌>을 이야기하면서 세트 얘기를 빼놓을 수는 없다. 이 영화는 까만 바닥의 세트장에서 진행된다. 바닥에는 하얗게 벽이 그려져 있고 몇몇 소품만 놓여 있다. 사람들은 문을 열거나 닫을 때 마임을 한다. 소리는 들린다. 이 시도로 인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마을 사람들 속에서 강간이 벌어지는 충격적인 장면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느낀 것은 단지 그것 정도였다. 이것은 라스 폰 트리에의 객기이다. 세트장에서 찍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았다.

2. 나는 3시간짜리, 그것도 라스 폰 트리에 영화를 보는 것이 싫었다. 억지로 보게 된 영화였다. 하지만 생각보다 영화가 너무 재미있었다. 여주인공의 시련이 하나둘 쌓여가고 그것이 조금씩 얽혀가는 과정을 보고 감탄했다. 정말 시나리오 잘 썼다. 3시간이 결코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3. 영화 본지 4개월이 지났다. 동아리에서 뭔 얘기를 했는데 내가 가지고 있던 궁금증은 해소되지 못 했다. 이 동아리 하면서 가장 부질없었던 날로 기억한다.

4. 나는 영화를 너무 많이 본다. 3시간씩이나 이 영화를 보고 거기다 동아리에서 이야기까지 하고도 나는 라스 폰 트리에가 이 영화를 세트장에서 찍은 이유, 크레딧에 사진들을 삽입한 이유를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다. 더 찾아보고픈 마음도 없고 그냥 빨리 리뷰 적고 잊어버리고 싶은 마음이다. 이렇게 영화 많이 볼 시간에 그냥 잘 쓰여진 고전 한 권을 읽어야겠다. 근데 생각을 하면서도 그게 잘 안 된다.

<늑대아이> 호소다 마모루의 육아



1. 어느 시점에서 하는 건지 모를 내레이션이 깔리면서 이야기가 순조롭게 진행되다 결국엔 그 내레이션의 시점까지 가서 영화가 끝이 난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았다. 과연 내레이션의 시점은 어디일까?라는 궁금증을 이용하는 플롯으로 영화를 만들어 보아도 좋을 것 같다. 긴 러닝타임을 체감상 줄여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2. 활동적인 성격의 여자아이는 어린 시절에 자신이 늑대라는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며 자신이 늑대이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상처 주는 일을 겪으며 인간의 길을 택하기로 한다.
조용한 성격의 남자아이는 어린 시절에 자신이 인간이라는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며 자기 안의 야생성을 느끼고 늑대의 길을 택하기로 한다.
우리 인생도 많은 변화 끝에 이렇게 온 것은 아닌지. 인생에 관한 통찰이 돋보였다.
소수자성에 대해서도 영화를 읽어볼까 싶었지만 감흥을 굳이 논리로 바꾸기 싫으니 다음으로 미루자.

3. 호소다 마모루의 <늑대아이>와 <괴물의 아이>는 환상적인 이야기에 상징성을 부가해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 같으면서도 결국엔 환상적으로 끝이 난다. 부담 없이 보기 좋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4. 온 가족이 보기 좋은 영화.

5. 호소다 마모루의 부드러운 그림 때문에 이 영화가 보고 싶었다. 디지몬 어드벤처 극장판도 다시 봐야겠다.

6. 클라이막스가 클라이막스 아닌 것처럼 다가온다. 뒤돌아보니 클라이막스였다. 부담스럽지 않게 다가가는 것도 정말 큰 재능인듯.

야한 영화보기 1. 스무살 보통 남자가 본 <위대한 소원>



1. <영 앤 뷰티풀> 이후로 내가 성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고 야한 영화도 좋아한다는 걸 인정하게 되었다. <위대한 소원>은 이번에 성을 다루는 영화를 챙겨봐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나서 본 영화이다. 기대치를 낮추고 보았지만 실망이 컸다.

2. 지금 드는 생각인데, 코미디 영화를 만들기는 정말 괴로울 것 같다. 내가 재밌다고 생각한 각본을 배우들에게 읽히고, 배우들이 그걸 여러번 연습하고, 나는 그걸 웃기게 연출해야 하고. 내 각본의 재미를 끊임없이 시험받는 느낌일 것 같다. 내 각본은 웃기다!라는 자신감을 영화 만드는 내내 붙들기도 어려울 것 같다. 인물의 대사 중간중간에 개 짖는 소리를 삽입하며 '이게 웃기지. 관객들도 이걸 보면 재밌어 할 거야.'라고 기대하는 그 과정이 무섭다. 하나도 안 재밌는데..

3. <스물>의 주인공들도, <위대한 소원>의 주인공들도 다 비현실적인 사람들이지만 굳이 비교하자면 <스물> 쪽이 그럴듯하다. 막 고등학교 시절을 지나온 내가 보기에 <위대한 소원>의 주인공들은 많이 경직되어 있다. 아닌 척 하는 이 영화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든다. 사람들이 섹스 기대하고 보러 오는 영화에서 섹스 얘기 꺼내기가 그렇게 힘들었는지, 90분 남짓한 영화의 절반이 다 지나서야 그 얘기를 꺼낸다. 현실의 남자 고등학생들이 섹스 얘기를 꺼내는 걸 그렇게 어려워 했던가? 더군다나 불량하게 묘사되는 주인공들의 경우에는 섹스 하고 싶다는 친구에게 미쳤냐고 정색하며 되묻는 것이 더더욱 이해가 안 된다.

4. "꼬꼬마로 죽기 싫어. 섹스 한 번은 해 보고 죽고 싶어. 섹스하고 어른으로 죽고 싶어."이것이 고환이 내세우는 섹스를 하고 싶은 이유이다. 내 경우에는 이런 이유이다. '많이들 하는데 나도 하고 싶어. 더 일찍 한 사람들도 많은데. 더는 늦기 싫어. 스무살 돼서 담배도 합법적으로 살 수 있고 술도 합법적으로 살 수 있고 모텔도 합법적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왜 섹스는 못 하고 있는 거야?' 성을 주제로 해서 내가 만들 영화에는 '어른'이라는 모호한 표현은 쓰지 않으려 한다. 너희들도 '어른'이 되어라는 고환의 마지막 메시지는 이 영화의 삼인방 중 유일한 섹스 경험자가 하는 말이기에 설득력 있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나는 이 무의미한 어른 담론이 지루하기만 하다. 어른이 되기 위해 섹스한다는 말은 정말 이상하게 들린다.

5. 장애인의 성을 다뤘지만 얄팍할 수밖에 없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장애인의 성. 너무 가벼운 터치가 아니었나 싶다.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쪽은 아니지만 이 주제가 공론화되었으면 좋겠다.

6. 이 영화는 너무 촌스럽고 재미도 없다. 흐름도 뚝뚝 끊긴다. 저런 영화는 만들지 말아야겠다.

2016년 11월 2일 수요일

이론서 [시학] 아리스토텔레스, 호라티우스, 플라톤, 롱기누스

문예출판사. 천병희 역.


아리스토텔레스 / 시학
호라티우스 / 시학
플라톤 / 시학
롱기누스 / 숭고에 관하여

아리스토텔레스와 호라티우스의 글만 제대로 읽었다.
플라톤의 시학은 그의 저서 [국가]에서 그의 예술관이 나타난 일부를 가져온 것이다.
스승과 제자의 대화체로 쓰인 플라톤의 글이 읽기가 너무 거북해서 플라톤의 글을 건너뛰고, [숭고에 관하여]를 읽을 때쯤엔 힘이 빠져 이 책 읽기를 그만두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읽은 것만 해도 큰 수확.
시대와 흐름을 읽는 것에는 실패했음을 염두할 것.


아리스토텔레스
희극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보통 이하의 악인의 모방이다. 이때 보통 이하의 악인이라 함은 모든 종류의 악과 관련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종류, 즉 우스꽝스런 것과 관련해서 그런 것인데 우스꽝스런 것은 추악의 일종이다. 45쪽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비극의 정의가 전개되는 제6장은 [시학]의 핵심으로 앞서 나온 장들은 비극의 정의를 위한 기초가 되는 장들이고, 뒤에 나올 장들은 이를 부연 설명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49쪽
비극은 행동의 모방이고 행동은 행동자에 의하여 행해지는 바 행동자는 필연적으로 성격과 사상에 있어 일정한 성질을 가지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이 양자에 의하여 우리는 그들의 행동을 일정한 성질의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51쪽
비극의 제1원리, 또는 비극의 생명과 영혼은 플롯이고 성격은 제2위인 것이다. 53쪽
성격은 행동자가 무엇을 의도하고 무엇을 기피하는지가 분명치 않을 때 그의 의도를 분명하게 해준다. 54쪽
시초는 그 자체가 필연적으로 다른 것 다음에 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 다음에 다른 것이 존재하거나 생성되는 성질의 것이다. 반대로 종말은 그 자체가 필연적으로 또는 대개 다른 것 다음에 존재하고, 그것 다음에는 다른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성질의 것이다. 중간은 그 자체가 다른 것 다음에 존재하고, 또 그것 다음에 다른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56~57쪽
플롯도 일정한 길이를 가져야 하는데 그 길이는 쉽게 기억할 수 있는 정도의 것이어야 한다. 57쪽
사건의 여러 부분은 그 중 한 부분을 다른 데로 옮겨놓거나 빼버리게 되면 전체가 뒤죽박죽이 되게끔 구성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있으나마나 두드러지게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은 전체의 부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61쪽
(시인은 인생을 알고 보편적인 원리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시인은 우리에게 인간성의 변함없는 여러 가지 특징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62쪽
그러나 비극의 경우는 기존 인명에 집착하고 있다. 그 까닭은 가능성이 있는 것은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일어나지 않는 것의 가능성은 아직 믿지 않지만 일어난 것은 가능성이 있음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64쪽
한 사건이 다른 사건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것과 다른 사건에 '이어서' 일어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68쪽
파토스란 무대 위에서의 죽음, 고통, 부상 등과 같이 파괴 또는 고통을 초래하는 행동을 말한다. 73쪽
네 번째 것은 추리에 의한 발견이다. 101쪽
유추에 의한 전용은 A에 대한 B의 관계가 C에 대한 D의 관계와 같을 때 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럴 때에는 B대신 D를, 그리고 D 대신 B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125쪽
(예를 들어 꽃(A):들(B)=별(C):하늘(D)이라고 한다면, B 대신 D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대치되는 말인 들(B)의 관계어 꽃(A)을 은유인 하늘에다 부가하면 '꽃의 하늘'이라는 은유적 표현이 가능할 것이다. 반대로 하늘을 들로 대치하고 그 관계어를 부가하면 하늘을 '별의 들'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125쪽
은유나 방언이나 기타 다른 말도 부적당하게 그리고 웃음을 자아낼 목적으로 사용된다면 똑같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적당하게 사용하면 얼마나 큰 차이가 나는지 서사시의 한 행을 일상어로 바꾸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방언이나 은유나 그 밖에 다른 말들의 경우에도 이를 일상어로 바꾸어보면 우리의 주장이 진실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31쪽
은유에 능하다는 것은 서로 다른 사물들의 유사성을 재빨리 간파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134쪽
스토리는 시초와 중간과 종말을 가진 하나의 전체적이고 완결된 행위를 취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만 작품은 유기적인 통일성을 지닌 생물과도 같을 것이며, 그에 고유한 쾌감을 산출할 수 있을 것이다. 135쪽
스토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역사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역사는 필연적으로 하나의 행위를 취급하지 않고 한 시기와 그 시기에 한 사람 또는 여러 사람에게 일어난 모든 사건을 취급하며 사건 상호 간에는 연관성이 없어도 무방하다. 135쪽




호라티우스
(153~178행. 드라마를 쓰려면 각 연령별로 그 특징을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168쪽
트로이아 전설권 중에서 한 가지 소재를 택하여 마치 알려진 적도 없고 이야기된 적도 없는 새로운 것을 처음으로 제시하는 양 무대 위에 올려놓는다면 그대는 보다 안전한 길을 걷는 셈입니다. 182쪽



플라톤
(예술에 대한 그의 주된 공격은 [국가] 제10권에서 전개되는데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이데아론에 입각하여 예술가들은 진실재인 이데아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상 또는 영상을 모방하는 데 불과하므로 가장 위험한 존재들이라고 매도하고 있다.) 11쪽
(플라톤은 모방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했다. 예컨대 침대의 경우 첫째로 이데아의 세계에 있는 신이 만든 불변의 침대 또는 침대 그 자체가 있고, 둘째로 이것을 모방하여 목수가 만든 개개의 침대가 있고, 셋째로 화가 또는 시인이 목수가 만든 침대를 모방하여 그린 침대, 즉 이데아 또는 진리로부터 세 단계나 떨어져 있는 가상의 모상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 또는 예술은 모방술이며 "모방술은 그 자신 열등한 것으로서 열등한 것과 결합하여 열등한 것을 낳는 만큼" 시인들은 당연히 이상국가에서 추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12쪽
그리고 비극 시인들은 단장격 운율로 작시하든 서사시 운율로 작시하든 간에 가장 진정한 의미의 모방자들이라는 점에 관해서 말일세. 236쪽


롱기누스
웅대한 것은 듣는 이들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황홀하게 하기 때문이오. 267쪽

<개를 문 사나이> 사람 죽이는 다큐멘터리



시도때도 없이 살인하는 남자를 따라다니는 모큐멘터리. 톤이 가볍고 경쾌하다. 컷이 넘어갈 때마다 충격의 연속. 이 영화가 미디어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만 만들어졌다고 보는 건 아쉽다. 그렇다고 보기엔 이 영화가 너무 재밌으니까! 서사도 없는 영화를 한시도 지루하지 않게 너무 잘 만들었다.

살인을 유쾌하게 담아낸 것은 이상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어느 영화보다도 사실적으로 묘사된 이 영화의 살인 장면들은 어째서인지 더 현실감이 없다. 장면마다 '와 이걸 어떻게 찍었을까...' '피해자들 연기 잘 하네..' 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든다. 페이크 다큐멘터리라는 형식은 관객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제작과정을 상상하게 만들기 때문.

생명을 경시한다? 아니 이 영화의 감독이자 배우들은 생명을 경시하는 '연기'를 한다. <개를 문 사나이>는 받아들여도 어느 액션영화에서 엑스트라가 우수수 죽어나가는 걸 안 좋아하는 이유는 그 영화에선 목숨이 도구적으로 쓰이기 때문. 그런 식으로 인간의 목숨을 가볍게 여기지는 말아야 한다.

이 영화에서 끄집어낼 만한 주제들은 그리 흥미롭지 않은 뻔한 주제지만, 누군가에겐 불쾌할 정도로 과격한 표현 방식이 내게는 매력적이다. 의외의 발견.

<프랭크> 천재를 바라보는 노력충을 바라보는 백수가.



"현도야, 너는 PD는 어때? 교양 쪽이나. 다큐멘터리 같은 거. 나는 자기 적성에 안 맞는 길을 가려는 사람들이 너무 안타까워.."
지금 이 말이 생각이 난다.



8월 18일 소모임 내 소모임에서 진행한 영화 이야기.
첫 영화는 <프랭크>였다.
세 명이서 대화를 했는데 시간이 촉박해 유의미한 이야기는 하지 못 했다.
이 영화에 쏟을 애정이 이제 없기에 더 이상의 재감상은 원치 않는다.




재능이 없으면 진작에 접는 게 좋다. 노력으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노력을 많이 하는 것도 아니다. 부디 내가 재능이 있기만을 바라며, 재능이 없다는 사실과 마주한다면 나는 어떻게 할지 계획이 없다. 재능있는 사람들 피 빨아먹으면서 살까?


오늘도 그저 그렇게 별 일 안 하고 하루가 지나간다. 남은 몇 시간동안에도 유의미한 활동을 하지 못 하고 오늘 하루가 사장되고 말 것이다. 의식적인 노력은 별로 안 한다. 무능한 내가 유능한 사람들 기회를 뺏는 것도 그닥 마음이 편하진 않을 것이다. 1년 후에 읽어도, 3년 후 에 읽어도, 10년 후에 읽어도 변함없이 게으른 나이기를. (이렇게 적어놓으면 내가 쫄려서 뭔가 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헛된 꿈을 꾸지 말라.. 하지만 이제 와서 접는 건 너무 무섭기도 하고. 그런데 아직 스무살인데 시간이 많은 건 사실이고. 영화는 취미로 할 때 더 마음 편하기도 하고. 블라블라..

예전에 나는 프랭크같은 예술가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고민을 하다 다음 기회에 답을 내리기로 결정했다. 이번이 답을 내릴 기회였다. 그러나 애초에 답을 내릴 수가 없는 질문이었다. 인생의 문제가 그렇게 답이 나오는 건 아니지.. 상황에 맞게 잘 해야지.. 응..

<돌연변이> 얕다.



1. 얼마 전 임상시험 테스트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고민 끝에 결국은 참여하지 않기로 했다. <돌연변이>라는 영화가 생각이 났다. 그 영화 개봉했을 때 극장에서 보고 싶었는데...

2. <돌연변이>를 보았다. 영화보다 현실이 더 재밌다는 얘기에 딱 들어맞는다.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광범위한 무대를 배경으로 일어나고 있는 사건에 비해 <돌연변이>의 크기는 매우 조촐하다. 사회성 있는 영화인데 그 고민을 감당할 예산이 안 된다.

3. 영화는 프레임 안에 담지 못 하는 사건들을 자료화면과 이천희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으로 처리한다. 너무 많은 걸 맡겨버린다. 영화로 표현하기에는 부적합한 시나리오였다 생각한다. 몰입이 정말 안 된다. 이야기에 가까이 갈 수가 없다.

4. 박보영이 연기를 정말 못 한다. 어색한 욕을 달고 산다.

5. 어린 것들 깔보며 분노조절 못 하던 박구의 아버지는 가스통 할배가 되어 시위를 다니고, 디씨에서 키보드배틀 하던 박보영은 덧글 달러 국정원에 들어간다. ㅋㅋㅋㅋ

6. 건드리고 싶은 것이 많았나 본데 그래서 그런지 이 영화가 하고 있는 말이 무척 산만하게 들린다. 모두까기.. 그리고 의미없는 해프닝...

7. 이광수의 큰 키나 목소리연기는 강조되지 않는다.

8. 나는 이 영화가 무척 장난스럽게 보인다.

<닥터 스트레인지> 이 세계 저 세계 넘나들고... 도시가 접히고.. 우왕.. 이걸 3D로..



1.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건 닥터 스트레인지의 능력을 '보여준 것'.
꼭 제대로 '보아야' 하는 영화들이 있는데 이번 영화가 그렇다.
그냥 2시간 내내 닥터 스트레인지가 세계 날아다니고 미러 디멘션 만들어서 도시 접어버리는 거 반복재생해줘도 좋았을 듯.
시각효과에 손 많이 쓴 티가 난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저런 색의 저런 형태의 세상을 구현해낸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닐 것이다.
웬만하면 3D영화 재미없게 보는데 이번 건 좀 신기했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보고 사람들이 말하는 시각적 경이가 이런 거였나? 싶었다.

2.
닥터 스트레인지의 능력이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다. 이것저것 할 줄 아는 게 많다.
캐릭터는 뻔하다. 좀 오만하고 뻔뻔하며 시시껄렁한 농담하는.
많이 조용해진 토니 스타크 정도?
마블의 히어로가 대부분 이런 성격인 것 같다.
또한 마블 영화 대부분이 은근히 '캐릭터성'에 좌지우지된다고 생각.

3.
영화는 오리엔탈리즘에 많이 기대고 있다.
서양에서 흔히 기대하는 동양의 미, 동양의 학문..

4.
마블영화 무난하다고 생각하는데 DC보다는 월등히 좋은 영화를 만든다.

5.
오프닝에서는 틸다 스윈튼이 얼굴을 가리고 등장했었다.
이 사람이 틸다 스윈튼이라는 걸 알게 된 순간 그녀의 얼굴을 보고 감탄했다.
삭발했는데 정말 예쁘다.
눈빛이 정말 깊었다.
모든 걸 다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배우로서 모든 걸 가진 얼굴이다.

6.
영혼들끼리 병원에서 대결하는 시퀀스는 꽤 창의적이었다.
액션 합이 정말 재밌었음.

7.
됐고 빨리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속편이 보고싶다.

8.
만약 호아킨 피닉스가 닥터 스트레인지로 분했다면?
잘 상상이 안 된다..

9.
히어로 영화에 논리란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DC는 너무 없다.

<써스페리아> 극단적인 사운드와 조명



공포영화 명작 리스트를 보다 색깔이 너무 이쁜 영화가 있길래 무작정 보게 되었다.
써스페리아. 40년 된 영화다.
이 영화 오프닝 시퀀스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다.


공항에서 나와 택시를 타고 폭우 속을 달리는 수지 베니온.
소름끼치는 음악과 효과음이 시종일관 귀를 불쾌하게 하고
빨강 초록 노랑빛 조명들은 화면을 정신없이 수놓는다.
자동문 열고 닫히는 모습, 강물이 쏟아지는 모습, 하수구 물 빠지는 모습 등이 극단적으로 클로즈업된다.
양철북이 마구 두드려지고, 어떤 여자가 비명을 지르는 이상하고 시끄러운 노래.
이내 카메라는 겁에 질린 듯한  어느 여인을 따라간다.
그녀는 정체 불명의 존재에 의해 매우 처참한 모습으로 살해당하고 그녀를 보호해주던 여인도 죽고 만다.

이런 극악무도한 오프닝을 봤나!
하지만 오프닝 이후는 퍽 실망스럽다.
미스터리 서사극이라고 치기에는 꽤 엉성한 이야기가 지루하게 흘러간다.
사운드와 조명은 별것도 없는데 호들갑을 떤다.
긴장감만 조성하던 공포의 실체는 마녀로 몰려 화형당한 학교 설립자를 추종하는 자들의 흑마법이었다.
시청각적으로 관객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한 영화였지만 내용이 너무 단순했다.


색에 정말 많은 신경을 쓴 것 같은데 피의 색깔이 너무 이상한 핑크색이다. 어쩌면 진짜같은 색의 피를 쓸 수 있었는데 이런 색의 피를 쓴 걸지도.
클라이막스에 등장하는 마녀보다 제물로 바쳐진 수지의 친구가 더 무섭다. 이는 문제인듯.
리메이크작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원작의 색을 지금 이 시대에 재현해 본다면 어떨까. 기대를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