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31일 토요일

<롤라 런> 개연성 없는 3부 구성



1. 길에서 마주친 사람의 미래를 사진으로 보여주는 건 재치있는 연출이었다. 하지만 나비효과를 너무 심하게 집어넣었다.

2. 속도감 있는 연출에는 올드하지만 빠르게 우당탕탕거리는 배경음악이 큰 역할을 했다.

3. 롤라의 패션... 마음엔 안 들지만 눈에 확 띄긴 한다.

4. 세 가지의 경우들 사이에는 어떠한 연결고리도 없다. 롤라의 기억이 리셋되지 않는 것도 아닌데 롤라의 행동은 달라진다. 경우들 사이에 삽입되는 서로의 사랑에 관한 질문들은 가볍기 짝이 없어서 감정이입도 안 됐다. 각본 정말 이상하게 썼다. 메시지 면에서는 <슬라이딩 도어즈>가 훨씬 나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시간이라는 중요한 요소도 고무줄처럼 마음대로 줄였다 늘였다 한다.

5. 중간중간 저화질 카메라를 사용하는 연출 괜찮았다.

6. 정 급하면 택시나 자전거라도 타지 그냥...

<내일을 위한 시간> 사실적인 각본



처음으로 본 다르덴 형제의 장편영화.
시나리오가 너무 안 써져서 주인공이 자신의 복직을 위해 작업장 동료들을 설득하는 과정이 대부분인 이 영화에서 힌트를 얻고자 했다.

각본이 기교 없이 무척 사실적이었다.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인물들에게 엄청난 사연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묵묵히 나아가는 영화이다.
내가 지향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꽤 대단하다 느꼈다.

2016년 12월 29일 목요일

<엘 토포> 처음으로 본 조도로프스키의 영화




<조도로브스키즈 듄>이라는 다큐멘터리로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 감독을 알게 되었다. 마약을 한 것과 같은 효과를 의도했다는 그의 말에 <엘 토포>라는 영화를 보았다. 하지만 시각적으로 유난히 특별한 영화는 아니었다. 서부극을 좋아하는데 졸려서 두 번이나 잤다. 뚝뚝 끊기는 컷 연결이 인상적이었다. 이 영화에서 느낀 것이 별로 없으니 상징들에 대해서 연구해볼 생각은 없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이 영화는 재조명되어야 한다




문제투성이인 영화다. 오해받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이제는 제정신 박힌 사람에게 이 영화를 추천하고 싶진 않다. 나는 과 영화제에 <클레멘타인>과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을 추천한 사람이 되어버려 더이상 사람들이 내게 영화 추천을 해달라 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직도 나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을 포기하지 못 하겠다. 애매하게 만든 흥행영화보다 이 영화에서 더 많은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번 감상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경로를 통해서는 아니겠지만 언젠가 다시 보게 될 영화임이 분명하다.

2016년 12월 28일 수요일

<나, 다니엘 블레이크> 실화가 되지 못한 설계


케이티가 다니엘의 글을 읽어주고 바로 끝나자 나는 깜짝 놀랐다. 이 영화는 말하고자 하는 바가 매우 선명했다. 오로지 다니엘의 마지막 말을 관객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이 영화는 100분간 달려왔던 것이다. 분명한 주제의식은 내 머리에 쏙 박혔지만 매력은 없었다. 다니엘이 겪어온 불합리 하나하나가 사회비판을 위해 시나리오 작가의 머릿속에서 설계되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에 이 영화가 실화를 기반으로 한 영화였다면? 내 반응은 지금과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 약간의 가공을 거쳤지만 다니엘 블레이크라는 사람이 겪은 불합리는 현재 우리 사회에 실제로 존재하는 비극이 되고, 그 비극이 우리 삶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만큼 다니엘 블레이크라는 창조된 인물이 당연히 부조리한 가상의 세계에서 겪는 사투가 불러오는 효과는 뜨뜻미지근했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부조리를 고발할 때는 실화영화 말고도 어떤 방법이 있을지 고민을 해 본다.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 예고된 비극




실패한 보석상 털이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늪에 빠진 이들의 가혹한 플래시백을 반복하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으로 끝이 난다. 숨이 막혔다. 완성도 높은 영화임은 분명하나 좋아하긴 어려울 것 같다.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겠고, 그게 있었다 한들 어딘가 과한 서사 속에 묻혀버린 게 아닌가 싶다. 이 답답한 영화에서 내가 얻을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 더욱 절망적이다.


2016년 12월 27일 화요일

<라라랜드> 미아가 마침내 이뤄낸 꿈에 관하여



오프닝에서 눈물이 터져나왔는데 사실 그건 영화 시작하기 전에 틀어준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예고편의 여운 때문이었다. 엠마 스톤과 라이언 고슬링 없이 이름 모를 배우들로만 채워지는 오프닝 때문인지 영화 보는 내내 이상하게 나는 미아와 세바스찬에게 몰입이 안 됐다. 황홀한 데이트 장면들도 내게는 그저 그랬다. 자기 꿈에 도움이 안 된다며 여자친구를 차버리는 <위플래쉬>의 주인공이 다미엔 차젤레에게 더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끝에 가서는 뜬금없이 미아가 다른 남자와 가정을 꾸리고 살아간다. 그 때 싸운 것 이후로 이 둘은 완전히 갈라섰나? 미아가 세바스찬과 이어지지 않은 이유를 더 설명해주었어야 한다.


위의 감상평은 내가 다른 사람이었어도 충분히 할 수 있는 말들이다. 내게 <라라랜드>는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에 특별했다. 나는 얼마 전 영화감독의 꿈을 접었다. 보러 가기 전 나는 <라라랜드>가 꿈에 대한 얘기랍시고 소용없는 응원으로 내 기분을 상하게 할까봐 걱정했었다. 주저 끝에 보게 된 <라라랜드>는 정말 그랬다.

5년만에 미아는 카페를 찾은 스타에게 커피를 내려주는 알바생에서 자기가 일하던 카페를 찾아 선심 쓰듯 자기 커피를 결제하는 스타의 자리에 오른다. 미아가 캐스팅 디렉터에게 캐스팅되었을 때부터 나는 납득할 수 없었다. 극중 미아가 오디션에서 보여준 연기는 잘 몰라도 그녀의 일인극을 찾은 몇 안되는 관객들의 악평을 우리는 들었다. 직접 판단할 시간을 영화가 허용하지 않았기에 글 솜씨도 잘은 모르지만 뛰어난 수준은 아닐 거라 짐작해볼 수 있다. 그랬던 그녀가 캐스팅 디렉터의 남다른 통찰력에 의해 우연히 발굴되었을지라도 그녀가 구체적으로 어디에 재능이 있고 어떻게 노력을 했는지는 알 노릇이 없다. 그녀가 배우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는 시간은 '5년 후'라고 자막처리될 뿐이고 우리는 그녀가 줄창 연애질 하다가 꽤 유명한 스타가 된 것을 보고 당황할 수밖에 없다. <위플래쉬>의 엔딩에 전율할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가 정말로 주인공의 연주를 보고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바스찬은 멋지게 피아노 치기라도 했지 미아는 정말 한 게 없다.

<라라랜드>는 꽤 색감이 이쁜 영화라고는 할 수 있어도 꿈에 대한 영화라고는 절대 말 못 하겠다. 거듭된 실패 끝에 마지막 도전을 했는데 성공! 역시 포기하지 않으면 꿈★은 이루어진다...? 나는 자기 능력을 못 믿는 미아의 대사에 뼈저리게 공감했다. 언젠가는 될 거라는 믿음을 갖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되돌아 봐야 하지 않을까. 이 영화가 볼거리와 음악에 힘 쏟아야 하는 뮤지컬 형식이라는 사실이 소재를 불성실하게 다룬 사실에 대한 면죄부는 되지 않는다.

2016년 12월 19일 월요일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 영화 얘기 말고 누군가를 비난하는 것에 대해

간략하게 영화에 대한 감상
1. 민정씨가 하는 짓이 너무 꼴보기 싫었다.
2. 권해효와 유준상이 중학교 동창이었다는 전개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
3. 느닷없는 해피해 보이는 엔딩. 정말 이런거야? 싶었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사람들 얘기를 듣다가,
내가 시간 순서의 꼬임을 전혀 인지하지 않고 보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영화가 별로다.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기 어려워서, 또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워서 영화 얘기보다는 '감독의 스캔들'에 대한 그동안의 생각들을 두서없이 늘어놓아보고 싶었다.

나는 김민희와의 불륜에 얽힌 홍상수를 싫어하지 않는다.
마이너스 감정을 이길 정도로 플러스 감정이 많았던 걸까
아니면 플러스 감정에게 질 정도로 마이너스 감정이 적었던 걸까?
후자라고 본다.
나와 관계도 없는 사람의 불륜에는 별 관심이 없다.
워낙에 불륜 얘기를 영화로 많이 하던 사람이라 이번에 일어난 불륜 사건이
그의 영화를 읽는 지침을 제시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든다.

요즘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의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이 문제다.
출연자 강간 장면을 사전 합의 없이 찍었다 혹은
강간 장면에 쓰이는 버터를 사전에 고지하지 않았다로 말들이 많다.
강간이라는 섬뜩한 단어가 들어가 있어 놀라긴 했지만
오히려 그 사실이 약간의 호기심을 불러왔다.

내가 그 소식을 접했던 순간으로 되돌아가 보자.
나는 왜 그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보고도 분노하기보다 그 쪽으로 더 마음이 갔을까?
그를 욕하는 사람들에 대한 묘한 반발심은 헤드라인이 뒤집혔으면 하는 기대감으로 이어졌다.

홍상수 일 때도 나는 그를 욕하는 사람들에게 주목했다.
내가 누군가를 나서서 비난한 적은 없다.
아마도 그동안 그렇게 해 본 적이 별로 없어서인 것 같다.
누군가를 싫어한 적은 있어도 누군가를 욕하기는 힘들었다.
어떤 상황에서 사람을 비난해야 할까?
사람을 비난해야 할 상황이란 있을까?
왜 누군가를 욕을 해야 할까?
이러다 누군가에게 욕해야 하는 중요한 상황을 망쳐버리는 게 아닌가?

누군가를 지지하는 건 아니지만 보는 사람에 따라서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싶다.
나는 열세에 있는 사람에게 감정이입을 하곤 한다. 그 사람이 악질이든 소문이 안 좋든.
감정이입의 대상이 잘못 돌아간 게 아닌가 싶기도 하면서
이야기꾼이 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하다.

넷상에 올리는 글이다보니 좀 더 정제된 형태로 말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어렵다.
앞으로 이런 글은 다시 일기로 써야겠다.
우디 앨런이랑 임권택, 로만 폴란스키 얘기도 하고 싶었으나 굳이 여러 사람을 다룰 필요는 없는 글이다.


2016년 12월 17일 토요일

<바보선언> 80년대 한국 실험영화



판소리와 오락게임 효과음이 깔리는 혼란스러운 세상.
대사 없이 아이의 내레이션으로 진행되는 초반부는 흥미롭다.
당시의 시대상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는 작품.

하지만 영화에 중심이 없어 꽤 지루하다.
또한 영화에 담긴 그 실험정신들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나로서는 알기 어려울 따름이다.

<에드 우드> 영화를 못 만드는 감독 얘기





1. 영화가 다루는 시간대 이후 등장인물들의 행적을 자막으로 나열할 때까지도 나는 이 영화가 실화에 기반한 사실을 몰랐다.

2. 영화 후반부, 이쯤하면 영화 잘 만들 때도 됐겠다 싶지만 시사회장 안의 사람들은 미쳐 날뛰고 있다. 에드 우드는 성난 관객들 사이에서 팝콘을 맞고 있는 동료들을 구하러 뛰어든다. 나는 이 장면이 묘하게 슬프기도 하고 행복해 보이기도 했다.

3. 영화를 아무리 만들어도 그는 영화를 잘 만들지 못 했다. 어쩌면 내가 영화에 재능이 없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나는 이상이 높아서 만족하며 살지도 못할 것 같다.

4. 에드 우드의 말년이 행복하기를 바랐으나 계속해 싸구려 영화만 찍다가 알콜중독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조도로브스키즈 듄> 내가 듄이다! 내가 듄이다!




지금의 스타 워즈의 위치에 있었을지도 모를 듄.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 감독이 각국의 거장들과 함께 진행하다 무산된 소설 [듄] 영화화 프로젝트를 돌이켜보는 다큐멘터리이다.
어느 자본가의 도움이 있었더라면 영화 역사가 완전히 뒤바뀌었을지도 모른다.

2016년 12월 11일 일요일

야한 영화보기 3. <숏버스> 성에 관한 새로운 영화





그렇게 야하다는 영화 <숏버스>를 보았다. 배우들이 실제로 성관계를 맺는 영화는 처음이다. 본 적 없는 신선한 이미지들이 펼쳐졌다. 야동에서나 보던 판에 박힌 성기나 섹스와는 많이 달랐다. 이 영화는 꽤 귀엽다. 관객을 흥분시키는 것을 주 목적으로 하는 영상들과는 다르다. 각본은 못 썼다. 이런저런 고민들을 던져놓고서 봉합하는 솜씨는 많이 부족했다. 하지만 성에 대한 고민을 헤쳐나가는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숏버스 클럽은 기분 좋다. 물론 실제로 저렇게 섹스하면 성병이든 법적 공방이든 문제 생길 게 뻔하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라도 이런 공간을 만나게 되어 너무 기쁘다.

악단이 등장하고 다같이 노래부르며 끝나는 엔딩이 정말 좋았다. 그 장면과 음악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야한 영화보기 2.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 거짓됨의 패배, 진솔함의 승리



섹스에 관한 솔직한 이야기를 털어놓는 그레이엄의 비디오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영화이다.
나는 야하거나 도발적인 작품을 기대했지만 그런 영화는 아니었다.
섹시한 신시아, 섹스 얘기하는 여성의 비디오를 보며 자위하는 그레이엄을 보며 나름 가슴에서 피어오르는 정열을 느껴보고자 했으나 아쉽게도 그저 그랬다.
인물들이 엄청 매력적인 것도 아니라 보는 재미도 없었다.


섹스가 과대평가받는다는 생각을 하는 앤의 캐릭터가 너무 앞뒤 꽉 막히게 표현될 때 나는 살짝 걱정했다.
이 영화는 앤이라는 인물로 대표되는, 섹스에 대한 보수적인 생각들을 비웃기만 하는 게 아닐까?
답답한 앤에 비해 좀 더 시원시원한 신시아가 매력적으로 그려졌다.
영화는 신시아 쪽을 좀 더 긍정적으로 그리는 듯했다.

하지만 결말부에서 전세는 역전된다.
존은 신시아와 불륜을 가지느라 미루곤 했던 의뢰를 잃었고, 신시아는 여전히 한적한 바에서 일하며 단골 손님의 추근거림은 끊이지 않는다.
일자리도 얻고 자신에게 맞는 짝도 찾은 앤은 신시아에게 가서 은근히 자신의 현재 위치를 과시한다.

이 결말이 당혹스러웠던 이유는 이 영화를 앤으로 대변되는 보수적인 가치관에 대한 신시아로 대변되는 진보적인 가치관의 승리로 읽으려던 나의 시도가 좌절되었기 때문이다.
영화가 지적하는 건 신시아와 존의 진보적인 가치관이라기보다는 부적절한 관계를 감추기 위한 거짓말이다.
이 영화는 어느 쪽 성 윤리관의 승리도 패배도 아닌, 거짓됨과 진솔함에 관한 이야기였다.

단순하고도 뻔한 도식이지만 영화의 의미를 찾아나가는 과정이 재미있었다.
아쉽게도 야한 영화를 찾으려던 목적에는 부합하지 않았다.


2016년 12월 9일 금요일

<부기 나이트> 아주 짧은 후기



오, 죽인다.
이래서 PTA PTA 하는구나!
워낙에 인물들이 많아서 정리하기는 힘들지만 정말 괜찮은 영화로 기억한다.
머지 않아 낮은 퀄리티의 영화들에 실망해서 다시 이 영화를 찾게 될 것.

<현기증>에 이어서 본 <열차 안의 낯선 자들>. 울림을 찾아서



<현기증>에는 있고 <열차 안의 낯선 자들>에는 없는 것이 사랑이다.
다른 히치콕 영화들에 견주어 볼 때, <현기증>이 특이 케이스였다.

감정 혹은 정서로 말하고 싶었으나, 상투적이라도 '사랑'이라고 적는 게 좋을 것 같다.
욕망, 호기심, 살의, 불안감 등의 것들을 감정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말 대신 '울림'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현기증> 후반부의 사랑은 스릴러 장르에서 보기 어려운, 울림 있는 긴장감을 주었다.
이 순간을 히치콕의 다른 영화에서 또 찾아보긴 어려울 것이다.
또한 <현기증>보다 만족스러운 그의 작품을 찾기도 힘들 것이다.


<열차 안의 낯선 자들>은 일상적인 공간에서 일상적인 소품과 함께 진행된다.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테니스 경기와 하수구에 빠진 라이터의 교차편집에서부터 회전목마 액션까지 훌륭한 솜씨로 자아내는 긴장감이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나를 끌어당기는 매력은 느끼지 못 했다.
<현기증>의 잔상이 아직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일까?
정서적인 울림에 목마른 나는 영화를 통해 그것을 느끼기를 간절히 바란다.

2016년 12월 8일 목요일

<이터널 선샤인> 네 번째 감상. 허지웅. 동아리.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연애중.


[허지웅의 경사기도권] 다시 시작하면 우리 과연 다를까

이 영화를 보고나서 연인과 다시 시작한 커플은 몇이나 될까. 아마도 그 선택을 저주하며 다시 헤어지기를 반복한 연인들의 수와 얼추 비슷할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지금은 당신의 모든 게 마음에 들어요”, “지금은 그렇겠죠. 그런데 곧 거슬려할 테고 나는 당신을 지루해할 거예요”, “괜찮아요”, “괜찮아요”로 이어지는 마술같이 낭만적인 화해의 끝에서 나는 늘 당혹스러웠다. 괜찮아? 정말 괜찮은 걸까? 저렇게 쉽게? 하지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노릇이다. 그들은 기억을 지웠으니까. 결론은 알고 있지만 그 결론에 이르렀던 모든 괴로움을 잊었으니까. 그래서 실감할 수 없으니까. 그러니까. 당장은 괜찮을 수 있다.



계속 헤어지기를 반복하니,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잘 안 맞는 사이인 걸까?
-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들이 서로에게 이끌렸고 사랑을 했다는 게 중요하다.

- 헤어졌다 만났다를 반복하는 사랑과 그대로 쭉 이어가는 사랑 중에 어느 것이 좋다 생각하나?
음...... 둘 중 택하자면 후자 쪽이다.


죽을텐데 왜 살아?
살찔텐데 왜 먹어?
헤어질 건데 왜 사랑하나?
우리는 사랑을 하는 슬픈 동물!





마광수 시집 [일평생 연애주의]



일평생 연애주의

나는야
평생 연애주의자

나는야
평생 변태성욕자

나는야
평생 허무주의자

나는야
평생 야한 남자

나는야
평생 오럴 섹스만

나는야
평생 고독, 절망, 쓸쓸만




정신적 사랑은 가라 中

하긴 그런 이유에서 진짜 우정은 반드시
동성애로 발전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지

살을 섞는 만남, 피부끼리의 살갗접촉에 의한
섹시섹시한 만남만이
진짜 이심전심의 만남이 될 수 있어

전혀 말이 필요 없어지고 머리를 굴릴 일도 없어지고
오로지 육감적 접촉에 의한
육체언어만 춤을 추는
끈적끈적한 만남만이 진짜 사랑이야, 진짜 우정이야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 中

아니, 그보다도 언제나 여학생들을 훔쳐보며 강의하는 나,
관능적 외로움에 가득 찬 나의 찝찝한 자위행위,
섹스에 굶주린 끝에 찾아오는 한없는 고독감,
미칠 듯한 로리타 콤플렉스의 주책없는 불타오름.




한국 페미니스트 여성들에게 보내는 충고 中

나는 야한 여자다.
나는 남자에게 서슴없이 몸을 주는 여자다.
야한 여자는 섹스에 적극성을 갖고서
'여성해방'에 대한 강박증에서 나온 '성 혐오증' 따위의
촌스러운 관념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섹스를 즐길 수 있는 여자다.

어쩔래? 나를 마초들의 노예라고 욕할래?
모든 건 내 자유야.




내가 쓸 자서전에는 中

내 자서전에서 독자들은
너무나 고상한 지식인 사회에
섞여 살며 힘들어했던
자신의 나약한 모습을 슬퍼하는 사람(중략)을
만나게 될 것이다




우리 사회 내부의 도덕적 이데올로기가 보수쪽에 치우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위 진보적인 지식인들이나 예술가들조차 이 점에 있어서만큼은 예외가 아니다. 110p

문학이나 예술은 이러한 성적 호기심과 욕망을 효과적으로 배출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이다. 116~117p




영화쪽으로만 너무 편중된 문화 소비를 하고 있던 터라 시집을 찾아보고 있던 와중에 마광수의 이름을 찾고 바로 책을 샀다. 나는 명성 자자한 마광수의 에로티시즘 문학이 궁금했다.

지금까지 보던 시들에 비해 흥미로운 소재이긴 하다. 하지만 시를 잘 쓴 것 같지는 않다. 읽다 보면 상투적인 표현들로만 가득한 시도 보이고 생각의 깊이가 느껴지지 않는 시도 보인다. 시 한 편 한 편보다는 한 권의 책에 담긴 맥락을 통해 마광수라는 한 사람을 생각하고 나아가서 말미의 해설에서 지적하는 도덕적 이데올로기를 보게 된다.

야한 묘사로 화제가 된 작가는 있지만 자신의 성을 정체성 삼아 전면에 내세우고 세상과 맞서는 작가는 드물다. 성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마광수의 작품들을 더 읽어볼 필요성을 느낀다.

2016년 12월 7일 수요일

<악어> 소모임에서 이야기하지 않은 영화


소모임에서 이 영화를 가지고 이야기하려고 했으나 다들 바빠서 모이지 못 하고 시간이 이렇게 흘러버렸다.
<악어> 감상은 두번째다. 이 영화를 딱히 두 번씩이나 볼 일은 없으나 그렇게 되었다.
첫번째 감상할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소모임 이후에 느낀 것들을 정리하며 리뷰를 작성하려 했는데 이 소모임이 거의 무산되었고 이 영화를 제안한 멤버도 딱히 의지를 못 느끼는 것 같다.
나도 다시 안 볼 영화 굳이 다시 봤는데 미안해하지도 않으니 짜증이 나서 이 소모임에 앞으로 나갈 일은 없을 것 같다.

2014년 10월에 쓴 리뷰

<사라진 기억> 나체 이미지, 4분간의 뜀박질


독특한 영화다.
내용보다는 이미지에 힘을 많이 준 영화이다.
다른 장면에 비해 유난히 길이가 긴 두 장면과 나체 이미지가 기억에 남는다.

길이가 긴 두 장면은 4분간의 뜀박질, 6분간의 대화이다.
4분간의 뜀박질은 루카스가 자신을 피해 도망치는 오로라를 붙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려가는 장면이다. 나체의 남녀가 끝없는 모래밭을 달린다.
6분간의 대화는 그렇게 붙잡힌 오로라와 루카스가 누워서 이야기하는 장면이다. 과거를 돌아보는 듯하다. 롱숏에서 시작해 얼굴 클로즈업으로 끝이 나는 롱테이크다. 루카스는 결국 오로라의 마음을 얻지 못 한다.

나체 이미지. 오로라의 무의식 속에는 나체 이미지가 자주 등장한다. 그 중 남녀가 집 안에서 옷을 벗고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다. 행복감에 잔뜩 취한 남녀를 볼 수 있다. 여자는 몸이 예쁘고 남자는 유륜이 크며 아래쪽에 털이 나 있다. 따뜻한 빛이 드리운다. 멋진 장면이다.



내용이 이미지를 마음껏 즐기는 것을 방해한다.
차 사고로 남편을 잃은 여자의 무의식 속에서 그녀의 남편을 대체하려는 남자의 이야기.
내용을 좀 더 잘 짰더라면 좋았을 듯하다.
내용에 힘 준다고 좋은 이미지를 못 쓰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이야기는 언제나 중요하다.

2016년 12월 6일 화요일

<현기증>(1958) 옛 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을 사랑하다



스릴러의 대가 히치콕의 영화에서 사랑이 중요했던 경우는 드물다.
<현기증>을 다시 보던 나는 후반부를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스카티는 길에서 자신이 사랑한 매들린과 똑 닮은 여자를 보고 그녀의 뒤를 밟아 그녀가 사는 호텔로 찾아간다.
여자는 그런 사람 모른다며, 자기 이름은 주디 바튼이라고 하지만 실은 정체를 숨긴 채 살아가던 매들린이 맞았다.
그녀도 여전히 스카티를 사랑하고 있었고 둘은 교제를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죽은 매들린을 향한 스카티의 집착은 주디의 옷과 헤어스타일 그리고 화장에 대한 강요로 이어진다.
마침내 그녀가 매들린의 옷과 얼굴을 하고 나타나자 스카티는 진심으로 행복을 느낀다.


스카티의 매들린을 향한 사랑이 주디에게로 이어지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아무리 다른 옷을 입고 다른 머리를 하고 다른 화장을 해도 길에서 마주친 그 순간 스카티는 주디에게서 매들린을 느꼈다.
스카티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주디를 과거 자신이 사랑했던 매들린처럼 바꾸려 한다.
범죄행각을 들키지 않기 위해 매들린의 껍데기로만 남아야 하는 주디는 스카티에게 매들린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 그 이상의 존재가 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스카티는 주디라는 한 사람의 신체를 사랑한 걸까?
틀린 말은 아니지만 스카티가 매들린 혹은 주디의 몸만을 사랑한 것이라 보긴 어렵다.
스카티는 매들린 그 자체를 떠올리게 하는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것을 원했기 때문에 주디에게 눈에 보이는 변화를 가했던 것이다.

정체가 들통난 주디는 매들린이 죽었던 종탑에서 발을 헛디뎌서 떨어져 죽는다.
만약 주디가 죽지 않았더라면 비밀을 알게 된 스카티는 현기증과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았을까?
또 매들린에 대한 집착에서도 벗어나 주디와 함께 잘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죄를 저지른 주디에게 어떻게든 벌이 내려지는 권선징악형 비극은 스카티를 더 비참하게 만들어버렸다.
여운을 느낄 새도 없이 바로 영화는 끝나버린다.
히치콕의 악취미가 드러나는 결말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스카티 앞에서 이러지도 못 하고 저러지도 못 하는 주디의 심정에 이입해서 후반부를 보았다.
정말 좋았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 glide



11월 4일 밤샘영화제 세 번째 작품.
영화 하려는 친한 형이 고른 작품이다.
네 편의 상영작 중 제일 기대했었다.

나는 중고등학생들의 관계를 표현하는 섬세함이 마음에 들었다.
나보고 내 중학생 시절 친구관계를 표현하라고 하면 기억이 안 나서 못 한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잠시 그 때의 주위 사람들을 들여다보는 느낌이 들었다.

이외의 것들은 너무 섬세해서 그런지 미약하게 느껴졌다.
부분적으로만 섬세하다.
이 영화 팬들이 듣는다면 되게 싫어할 말이지만, 연결이 안 된다.
섬세한 터치를 모아 눈에 보이지 않는 원석에 가까운 감성을 표현하려 했겠지만 그 터치들의 연결에 있어서 비약이 너무 심해 산만한 느낌을 준다.
중심 없이 빙 둘러 말하는 것을 나는 싫어한다.

이 영화만의 독특한 자막은 개성은 있지만 특별히 무슨 효과를 불러일으킨 것은 아니다.

노래는 좋다.
그런데 얼마 전 유투브에서 릴리 슈슈의 곡들을 듣을 수 있는 경로가 차단되었다.
영화는 그저 그랬지만 릴리 슈슈의 곡들은 다시 듣고 싶다.

<와이키키 브라더스>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산다는 거











어젯밤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갑자기 생각이 나서 너무 슬펐다.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꿈에 대한 비관론이다. 나는 여기에 즉각 반박하고 싶으나 어찌 할 말이 없다. 영화 전체가 스러져가는 풍경들이다. 고작 17분 나오는 과거의 추억마저도 어째 짠해 보인다.



영화가 다루는 꿈은 밴드 하겠다는 꿈이다. 나는 영화 하겠다는 꿈을 가졌었다. 지금은 영화 하고싶지 않다. 이런저런 이유가 많다. 나는 한때 내 꿈에 대해 열심히 떠들고 다녔던 사람이고, 지금은 어떻게 됐냐는 질문에 답하기가 껄끄럽다. 내가 영화를 많이 알고는 있지만 예전만큼 좋아하지 않기도 하고, 내 야심을 만족시킬 능력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관객들을 설득하는 데도 많이 지쳤다. 또 이렇게까지 희생하면서 영화를 하고 싶지도 않다.
누구도 나를 안타깝게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구도 내 이유를 변명이라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약한 게 아니라 내가 싫어져서 그만두는 거였음 좋겠다.


스러져가는 풍경들.
영화 시작부터 밴드 멤버 한 명이 떠난다. 나이트클럽이나 동네 행사장에는 짝퉁가수들이 언제나 있다. 허구한날 멤버들은 여자 문제로 싸우기 바쁘다. 어릴 적 자기한테 눈길 한 번 안 주던 예쁜 여자애는 트럭 몰면서 억척스럽게 살고 있다. 기타 선생님은 알콜중독으로 살아가고 있다. 일하는 나이트클럽 사장이 마음에 안 든다던 애는 음악 배워서 다시 일하러 들어간다. 동네를 떠난다는 얘기를 하기 위해 멋진 카페에 데려가니 프러포즈하는 줄 알고 기대하고 있었다.
우울하고 힘이 없다. 꿈을 가진 나로서는 지켜보기가 너무 힘들었다.

2016년 12월 4일 일요일

김영하 장편소설 [너의 목소리가 들려]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저 구름 위로 올라간 마술사가 어디로 갔을지 궁금했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의 조수를, 마술사가 사라진 뒤 내시의 피로 흥건했을 현장에 홀로 남겨졌을 소년은 어떻게 됐을까를 생각한다. 9p 프롤로그

그녀는 아기를 들어올렸다. 바로 그 순간, 울음이 터졌다. 맨홀 뚜껑을 밀어올리고 치솟아오르는 장마철의 하수처럼, 울음은 그녀가 앉아 있는 부스 안에서 소용돌이치다가 화장실 전체를 채우더니 그대로 흘러넘쳐 소란한 터미널로 나아가 사람들을 덮였다. 16p

내가 제이를 데리고 내려오기 위해 서둘러 지그재그로 주류상자들을 딛고 올라가는 사이 제이는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두 팔을 양쪽으로 벌리고 몸의 중심을 낮추는 것이 마치 권력자의 강압에 못 이겨 마음에도 없는 춤을 시작하려는 어린 댄서 같았다. 31p

내가 원하는 것을 제이가 알아차려준다는 것의 달콤함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환상을 깨고 싶지 않았다. 그래, 그거. 나는 고개를 끄덕여 제이가 원하는 것을 그냥 내가 원했던 것인 양 믿어버리곤 했다.
제이는 내 욕망의 수신자가 아니라 통역자였다. 34p

"그렇다면 고통의 경중은 누가 가리지? 네가 가리나? 우리에 갇혀 있는 개들만 고통받는 줄 알아? 개장수들도 먹고사느라 힘들다고. 그 사람들에게도 가족이 있어. 네가 타이어를 펑크냈기 때문에 그 집의 아이들이 하루를 굶어야 할지도 모르잖아?"
"그렇게 따지기 시작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잖아요?" 73p

83~84p
(대학로의 비보이 리더가 제이에게 경고하는 대사)

"하여간 지도 빈대면서 말 졸라 많네. 좀 셔럽하세요, 이 씨발아." 92p

화장실 밖으로 나온 제이는 사과를 깎고 놓아둔 과도를 한참이나 노려보았다. 뭔가 위험한 기운을 감지한 큐빅이 옆으로 다가와 말없이 제이의 팔을 잡았다. 101p

함구증의 시절에 제이는 내 욕망의 통역자였다. 이제 그는 내 고통을 읽으려 하고 있었다. 나는 쉽게 읽고 던져버릴 수 있는 대중소설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131p

"신은 원래 그런 존재야. 신은 비대칭의 사디스트야. 성욕은 무한히 주고 해결은 어렵도록 만들었지. 죽음을 주고 그걸 피해갈 방법은 주지 않았지. 왜 태어났는지는 알려주지 않은 채 그냥 살아가게 만들었고." 134p

제이는 두 번이나 버려졌고 험난한 몇 년을 보냈다. 독서량이나 생각의 깊이에서 나를 압도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내 인생에 대해 툭툭 던지는 조언 혹은 해결책은 내가 겪고 있던 존재의 위기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 같았다. 제이에게 그런 일들쯤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부모가 이혼을 하고, 혼자 살던 아버지가 아이 둘 딸린 여자와 재혼을 하고, 그렇게 들어온 새엄마가 나를 끔찍하게 불신한다는 정도의 일은 TV만 틀면 나오는 진부한 이야기에 불과했다.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은 제이에게는 너무나 간단한 일이었다. 147p
제이에게 가 닿는 내 모든 절실한 문제는 흔해 빠진 재혼가정에서 벌어지는 별반 대수로울 것도 없는 이야기로 전락해버렸다.147~148p

권력은 폭력이 본래 구현하려던 것을 폭력 없이 구현하는 힘이라는 것을 금세 알아차렸다. 161p

"폭주는 우리가 화가 나 있다는 걸 알리는 거야. 어떻게? 졸라 폭력적으로. 말로 하면 안 되냐고? 안 돼 왜? 우리는 말을 못 하니까. 말은 어른들 거니까. 하면 자기들이 이기는 거니까 자꾸 우리보고 대화를 하자고 하는 거야." 163p

"거기서 누구 하나를 때리면 어른이 나타나서 물어. 왜 그랬냐고. 나는 그게 대화이고 관심인 줄 알았어.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그냥 묻기만 해. 그러고는 벌을 줘. 하지만 적어도 혼자 삭일 필요는 없는 거지. 어차피 세상은 우리에게 벌을 줘." 163p

그러나 집으로 돌아와서는 다치고 멍들었을 그가 안쓰러워 조금 울었다. 184p

너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다, 라는 말로 단호하게 규정되었고, 그러자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그 말에서 헤어날 수 없게 되어버렸다. 184p




이번에 읽은 김영하의 장편소설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꽤 실망스러웠다.
폭주족 에피소드가 시작하면서 소설은 겉잡을 수 없이 지루해졌다.
10대들이 오토바이 타고 폭주하고 다니는 것은 너무 옛날 얘기 아니면 지금도 음지에서 일어나지만 내가 모르는 얘기일 것이다.
폭주족의 심리를 풀어쓴 대목은 어느정도 공감이 가지만 전혀 흥미롭지 않았다.
재미도 없고 멋지지도 않은 이 부분은 이야기의 상당부분을 차지한다.
그 누구라도 화자인 동규가 주목하는 제이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이 부분쯤 되어서 그는 동규 그리고 승태로부터 너무 멀리 떠나온 존재가 되어버린다.
이야기는 뜬금없이 등장한 인물 박승태를 중심으로 힘없이 맥없이 8.15 전야의 폭주를 루즈하게 풀어놓는다.

이야기는 꽤 일찍 끝이 나고 우리는 꽤 이른 에필로그를 맞닥뜨리게 된다. 에필로그에 따르면 이 소설은 실화에 기반했다고 한다. 에필로그 또한 작가의 픽션이 아닌가 싶었지만 일단 그렇게 믿어달라니 믿어 본다. 하지만 제이의 승천만은 너무 과장되지 않았나 싶다. 나보고 그걸 믿으라고?

제이가 겪는 일들을 마주하며 나는 소외감을 느꼈다. 그가 겪은 세계는 너무 올드한 터치로 그려져 있었다. 그리 오래지 않은 시간 전에 아이였던 내가 감히 아이들에 대해 말하건대, 아이들의 말은 이 소설의 대사(대표적으로 83~84쪽에 걸친 대학로 비보이 리더의 말)처럼 길거나 심각하지 않다. 대사의 주인이 아이라고 하기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고 너무 많은 생각을 하고 있다.
화자인 동규의 묘사 또한 그 깊이가 너무 깊다. 서술에서 나는 동규가 아닌 40대 후반의 작가 김영하를 떠올렸다.

폭주족 에피소드를 읽다가 소설 읽기를 그만 둘까 싶었지만 꾸역꾸역 다 읽어냈다. 에필로그가 마음에 걸린다. 진짜로,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 몇 사람들의 입을 거치고 작가 김영하를 통한 결과물일까? 제이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런 사람이 실제로 있기나 했을까? 어떻게 생겼을까?


놀랍게도 이 소설에서 나는 딱히 느끼는 것이 없었다. 무엇을 표현하려 했을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괜히 이 책을 택한 것 같다.

2016년 12월 3일 토요일

<로리타>(1962) 험버트와 퀼티



1.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이지만 큐브릭의 터치는 보이지 않았다. 큐브릭의 사랑 영화는 이게 처음이다. <로리타> 이후로 큐브릭 영화들이 무겁고 진중해진 것 같다.

2. 험버트는 권총으로 샬롯을 살해하려 하지만 욕조에는 아내가 없다. 그녀는 서재에서 험버트의 모든 것이 담긴 일기장을 보고 충격을 받아 도로에 뛰어들어 사망한다.
일기장으로 인해 샬롯이 모든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일기를 쓰고 있고, 과거에도 일기를 썼던 나는 누군가 나의 순간순간의 감정들이 적힌 일기장을 보게 될까봐 무섭다.

3. 영화는 다시 오프닝으로 와서 끝이 나게 된다. 이렇게 영화가 힘주어 말하는 시작과 결말의 정서는 쓸쓸하고 허망하다. 롤리타, 그녀의 아무 것도 모르는 새로운 남편.. 그 누구에게도 화풀이하지 못한 험버트는 자신의 사랑을 앗아간, 혹은 원래부터 소유했던 롤리타의 유일한 사랑 퀼티를 '처형'한다. 하지만 퀼티는 롤리타와 이미 헤어진 지 오래이고 술에 찌들어 정신이 나가버린 상태이다. 그를 죽인다고 험버트가 얻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퀼티를 죽이는 것은 통쾌하지도 않았다. 살인죄로 재판을 기다리던 그가 혈전증으로 사망했음이 자막처리되며 영화는 끝이 난다. 관객들도 퀼티의 존재를 다 알고 있었다. 그만 몰랐다.

4. 소아성애에 대한 윤리적 판단에는 무심한 듯하다. 그 쪽에 대해 이야기할 법도 했을텐데. 이 영화는 재밌고, 허망하고 하다.

미드 [트윈 픽스] 시즌 1&2를 보고


등하굣길에 폰으로 보던 미드 [트윈픽스].
정말 좋아하는 영화 감독 데이빗 린치의 작품으로 유명한 미드이다.
미드는 물론이고 드라마 자체를 정주행 성공한 게 이번이 거의 처음이다.
시즌 2 초반에 로라 파머 살인사건의 범인이 밝혀지고 윈덤 얼 에피소드로 넘어가면서 이야기는 급격히 루즈해진다. 완결까지 참고 보느라 고생했다. 실컷 딴 얘기 하다가 에피소드 끝나기 2분 전에 툭 던져주는 떡밥 가지고 겨우 버텼다. 90년대 드라마라 그런지 요즘의 드라마에 비해 호흡이 많이 느리기까지 하다.

평화로운 시골 마을 트윈 픽스에서 여대생 로라 파머가 시체로 발견되어 그 곳에 파견된 FBI 요원 데일 쿠퍼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마을 이야기. 로라 파머를 죽인 범인이 누구인가?에 대한 답은 매우 간단하다. 하지만 추리에는 별 도움이 안 되는 잡다한 마을 내 인간관계가 주로 다뤄져 그 답까지 가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 잡다한 마을 내 인간관계는 정말 쓸데없다. 누군가는 이것을 트윈 픽스 시리즈의 정체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 시즌 1,2를 보았을 때는 재미도 없고 긴장감도 없을 뿐더러 궁금하지도 않다. 시즌 3가 어떻게 만들어질지 지켜봐야겠다.

흥미로웠던 건 좋든 싫든 수사관 데일 쿠퍼가 초월적인 힘으로 수사를 해나간다는 것. 초능력 수사관 데일 쿠퍼! 추리물을 써나가는 센스는 매우 부족하다. 하지만 쿠퍼가 꿈이나 환상을 통해 단서를 얻는 장면의 연출이 너무 좋았다. 지금 봐도 이게 어떻게 TV 드라마에 나와? 할 정도로 매우 신기한 이미지이다. 아예 쓸데없는 거 빼 버리고 검은 오두막을 많이 보여줬으면 좋았을텐데..

또 한 가지 흥미로웠던 것은 킬러 밥이라는 캐릭터의 존재이다. '순수한 악'이란 것을 한 명의 배우를 이용해 표현하다니 놀랍다.

검은 오두막 장면, 거인 환상, 킬러 밥 환상은 말할 것도 없이 최고의 명장면이다. 그런데 딱히 중요하진 않지만 이상하게 마음에 남는 장면 하나가 있다. 벤 혼과 제리 혼 형제가 호텔이 망해가는 상황에서 회상하는 과거 씬이었다. 그들은 이층침대에 누워 어느 외국인 소녀가 추는 춤을 보고 있었다. 어렴풋한 기억이라 프레임 수가 적었던 것 같다. 그 장면을 찾고 싶은데 어느 에피소드인지 기억이 잘 안 난다.

린치의 드라마까지 정주행하며 린치 월드를 구경해 보았다. 드라마 [트윈 픽스]는 이해 가능한 스토리에 린치 특유의 연출이 더해진 드라마이다. 걸출한 드라마들이 많이 쏟아져 나오는데, 린치의 팬이 아니라면 굳이 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장면들에선 그 어떤 드라마에서도 보지 못한 충격을 느낄 수 있다.

에세이 [데이빗 린치의 빨간방: 컬트의 제왕이 들려주는 창조와 직관의 비밀]


한편, 데이빗 린치는 30년간 명상을 해온 명상의 고수로, 2005년 '의식 기반 교육과 세계 평화를 위한 데이빗 린치 재단'을 출범시켰다. 따라서 이 책의 판매수익은 각 학교의 초월명상 프로그램을 지원하기 위해 재단으로 보내진다. (책날개 지은이 소개)

영화에서 뭔가를 보았을 때, 좀 더 그것의 정체를 명확히 보려고 애쓰는 것이 좋다. 그리고는 친구와 다시 얘기를 나눠 보자. 그러다 보면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다. 38p

이처럼 한 영화를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당신이 만든 영화를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해서 신경을 쓰거나, 영화가 사람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거나 이러저러한 효과를 가지지 않을까 염려한다면 당신은 영화를 더 이상 만들지 말아야 한다.
그냥 당신이 좋아하는 영화를 만들어라. 아무도 그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40p

<블루 벨벳>의 첫 번째 퍼즐 조각은 빨간 입술, 푸른 잔디, 그리고 바비 빈튼이 부른 노래 [블루 벨벳]이었다. 그다음 조각은 풀밭에 떨어져 있는 잘린 귀였다. 그것이 전부였다.
당신은 아주 작은 조각에 불과한, 최초의 아이디어와 사랑에 빠져야 한다. 그러면 나머지는 시간이 지나면서 저절로 풀려나간다. 41~42p

모든 인간의 내부에는 순수하고 진동하는 의식의 바다가 있다. 초월명상을 통해서 '초월'하게 될 때 당신은 순수한 의식의 바다로 잠수해 들어간다. 그 바다로 풍덩 빠지는 것이다. 그러면 엄청난 행복감이 밀려온다. 이 행복감으로 당신은 떨게 될 수도 있다. 순수한 의식을 경험하면, 의식의 바다는 더 생생해지고 더 넓어진다. 또 의식의 바다는 더 펼쳐지고 더 자란다.
(...)
또 의식을 확장하면 당신은 깊은 곳에서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게 된다. 실제로 창의력은 깊은 곳에서 흘러나온다. 따라서 의식을 확장하면 당신은 환상적인 게임을 즐기듯이 삶을 살 수 있다. 44~45p

영화 <듄>은 여러 사람의 앞길을 망쳐 버렸다. 결국, 여러 사람이 영화제작에서 손을 떼게 됐다. 75p

특히 처음 리허설 때는 정말이지 많은 얘기를 하게 된다. 여러 가지 말을 나누는데, 때로는 이상하거나 쓸데없는 얘기도 한다. 그러면서 배우들과 조금씩 코드를 맞춰 간다. 85p
흔히 '리허설'이라고 하면 배우들만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모든 부문의 사람들이 함께하는 리허설도 있다. 모든 제작진이 함께 같은 길을 가고 있는지, 본래 아이디어대로 가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자리다. 86p

다음과 같이 말하면 일이 점점 더 제대로 굴러가고 사람들이 더 행복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할 일이고, 여기가 우리의 현 위치입니다. 우리가 성취할 바는 이것입니다." 90~91p

[트윈 픽스] 92~94p
(파일럿 에피소드 촬영 중 의상 담당자 프랭크 실바로부터 킬러 밥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은 사연)
주의를 기울이고 있으면 아이디어는 기묘한 방식으로 찾아오게 마련이다. 때로는 꿈꾸는 일이 촬영장에서 생긴다.
그렇지만, 나도 이 장면을 어디에 쓸지,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했다.
이 같은 일이 생기면 우리는 꿈꾸기 시작한다. 한 가지 일이 다른 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러도록 내버려 두면 전혀 다른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한다. 영화는 최종 완성판이 나올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므로 항상 주의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100p

예술가 중에는 분노나 침울함과 같은 부정적인 요소들이 예술 작업에 도움을 준다고 여기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분노나 두려움을 꽉 움켜쥐고 작품 속에 그것을 표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 행복에 빠지면 예술가로서의 번득이는 예지나 힘을 잃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 108p

나는 한 인간이 정말 살인을 저질렀다면 어떻게 삶을 이어갈지 궁금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나는 공포를 회피하려고 마음이 스스로 기만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심리학 용어인 "심인성 기억상실"이라는 말을 접하게 됐다. <로스트 하이웨이>는 그런 심리현상에 대한 영화다. 그리고 영원한 비밀은 없다는 점을 지적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121p

나는 상자와 열쇠가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127p

영감이나 아이디어가 떠올랐는데도, 도구와 장소가 있는 작업실이 없으면 실현하지 못할 수도 있다. 133~134p

[펠리니] 140~141p
펠리니는 나를 옆에 앉혔다. 그는 침대 두 개 사이에 작은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그는 내 손을 잡았고, 우리는 나란히 앉아 약 30분간 얘기를 나눴다. 나는 질문을 별로 하지 않고 주로 그의 말을 들었다. 그는 옛 시절이 어땠는지를 이야기해 주었다. 그의 옆에 앉아 얘기를 듣는 것은 정말로 좋았다. 이윽고 우리는 병실을 나섰다.
그때가 금요일 밤이었는데, 일요일 그는 혼수상태에 빠져 결코 깨어나지 못했다.

"큐브릭이 '오늘 우리 집으로 가서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함께 보지 않겠느냐?'고 해서 우리는 대찬성을 했죠."
그날 그들이 큐브릭의 집에 갔을 때, 그는 <이레이저 헤드>를 보여 주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지금 당장 죽더라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143p

제작사나 돈을 댄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고 무언가를 해서는 안 된다. 내 경험에 비추어 보면 그럴 때 언제나 역효과를 빚는다.156p
당신의 작품을 출품할 수 있는 영화제가 수없이 많다. 영화제에 수없이 출품하다 보면 나중에라도 배급이나 재정 지원을 얻을 수도 있다. 156p

행복을 키우고 직관을 키워라. 일하는 즐거움을 경험하라. 그러면 당신의 얼굴은 평화로운 가운데 환하게 밝아질 것이다. 그러한 당신을 보고 친구들도 행복해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당신과 자리를 함께하고 싶어 할 것이다. 162~163p

<로스트 하이웨이>
이러한 영화의 무겁고 괴기스러운 분위기에 이끌리다 보면 설명이 불가능한 사건에 뭔가 숨겨둔 게 아닐까 하고 생각되지만 정작 감독은 '그런 식의 독법은 필요치 않다. 이성이 아닌 직관으로 보라'고 주문한다. 184p




유투브에서 데이빗 린치의 동영상을 찾아보다가 그가 웬 초월명상에 대해 강의하는 걸 보고 실망한 적이 있다. 그가 얘기하는 초월명상이란 게 딱 봐도 사이비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실망한 채로 있다가 중고서점에서 우연히 보게 되어 충동적으로 이 책을 사 버렸다.
이 책은 데이빗 린치의 짦은 메모들로 이루어진 에세이이다. 국내 제목은 [데이빗 린치의 빨간방: 컬트의 제왕이 들려주는 창조와 직관의 비밀]이지만 원제가 [Catching the big fish: meditation, consciousness & creativity]이다. 책날개에 실린 저자 소개에서부터 이 책의 판매수익이 데이빗 린치가 세운 초월명상 재단에 전달된다고 한다. 제목만 보고 책을 구입하진 말자...

이래저래 더 실망한 채로 책을 보았는데 내게 생각보다 많은 영감을 주었다. 우선 데이빗 린치가 그렇게 좋다 하는 명상은 해 볼 생각이 없다. 나는 명상을 통해 의식을 확장시키고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근거없는 믿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믿음을 기반으로 한 린치의 작업 방식은 매우 흥미로웠다.
<멀홀랜드 드라이브>같은 영화를,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내는 걸까?
린치의 말에 따르면 그는 '빨간 입술', '푸른 잔디', '바비 빈튼의 블루 벨벳'같은 퍼즐 조각을 차례차례 떠올리면서 <블루 벨벳>을 구상해나갔다고 한다. 아, 역시 보통 방식으로 만든 게 아니었구나. 그의 영화는 순간 머리를 스친 이미지들의 집합이었다. 그가 영화를 구상한 방식처럼, 영화를 다시 볼 때는 논리보단 직관으로 풀어봐야겠다.

어두운 린치의 세계관과는 달리 그는 행복한 상태에서 작업에 임한다고 한다. 더불어 스트레스같은 부정적 감정에서 예술을 끌어낼 필요가 없다고 말하기도. 딱 그게 내 방식인데...

이렇게까지 다 알려주는데 린치의 방식대로 한 번 작업해보고 싶기도 하다. 책을 읽으면서 뭔가 만들어 보고 싶은 의지가 샘솟았다. 

현장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지침도 담겨있다. 물론 그의 방식을 무조건적으로 따를 필요는 없다.